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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넘어선 권리, 21세기 세계인권선언의 과제

by 손동혁

1948년 12월 10일, 유엔(UN)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경험을 교훈 삼아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인류의 보편적인 규범으로 확립하고자 했다. 이 선언은 이후 민주주의·평등·평화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국가, 국제기구, 시민 사회의 행동 지침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인권을 둘러싼 환경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상과 권리를 재편하고 기후 위기와 생물다양성 손실은 모든 생명체의 존속을 위협한다. 이제 ‘인권=인간만의 권리’라는 전제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세계인권선언 역시 인간 중심주의의 틀을 넘어서 새로운 존재와 환경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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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백과


그리고 세계인권선언이 제정된 1948년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이 오늘날 인류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제 선언문은 이 새로운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은 막대한 편리함을 주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차별과 감시, 노동권 파괴라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에 ‘디지털 자기 결정권’, ‘알고리즘에 대한 설명 및 거부권’,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와 같은 새로운 권리를 명시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나아가 기술이 인류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AI 개발자와 플랫폼 기업의 책임과 규제를 명문화해야 한다. 유네스코가 2021년에 채택한 인공지능 윤리 권고(Recommendation on the Ethics of Artificial Intelligence), OECD의 AI 원칙 등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권리와 의무의 주체를 과감하게 확장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이 국가를 주요 의무 주체로 상정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오늘날 개인의 삶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국가 권력보다 거대 다국적 기업이나 플랫폼의 알고리즘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 발맞추어 기업과 같은 비국가 행위자에게도 인권 존중의 의무를 명확히 부과해야 한다. 더 나아가 권리의 범위를 공동체, 미래 세대, 비인간 인격체에까지 넓히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급하다. 이이는 선언적인 구호에 그치지 않고 국제법과 국내법 적용 체계를 실질적으로 개혁해 집행력을 확보해야 할 중대한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실행과 감시 메커니즘을 강화해야 한다. 선언적인 문구만으로는 기후 위기나 AI 윤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파리협정, OECD AI 원칙 등 개별 국제 규범들을 세계인권선언의 틀 안으로 통합하여 구속력 있는 집행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와 국제기구는 물론, 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기업과 개발자, 그리고 감시의 주체인 시민사회까지 참여하는 다층적인 감시·평가 체계를 구축해 ‘종이 위의 권리’가 아니라 ‘현실의 권리’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이 밝혔던 ‘모든 인간의 존엄’이라는 위대한 이상은 이제 시대를 넘어 ‘모든 생명과 미래 세대의 존엄’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공지능의 출현과 지구적인 생태 위기는 인권의 개념을 인간 중심의 울타리 안에 더는 가둘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다. 21세기의 인권은 인간의 권리를 넘어 지구와 기술,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존재들과의 공존을 모색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다시 한번, 세계인권선언이 시대의 요구에 응답해야 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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