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아 Aug 02. 2019

오래된 친구와 술을 마셨다

그냥 일기 같은 것이다.


잡혀 있던 약속이 깨졌다.


일찌감치 퇴근해 샤워하고 집에서 맥주나 한 캔 딸까 했다. 그런데 문득, 오늘은 꼭 누구랑 같이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집 근처에 눈여겨보던 술집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웃고 싶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연락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님 오늘 뭐하시는지'


곧바로 답이 왔다. 우리는 술을 먹기로 했다.


A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의 친구였다. 크게 싸워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던 중학교 1, 2학년 때를 제외하고는 학년 초에 작성하는 교우관계 조사서의 '가장 친한 친구' 란에 한 번도 빠짐없이 서로의 이름을 적어 냈던 친구. 물론 그 동안 더 자주 만나고 더 가깝게 지내는 새 친구들이 많이 생겼지만, '가장 친한 친구'를 물으면 너무 당연하게 서로의 이름을 말했다.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 좁은 동네에서 같은 학교를 나왔기에 대학을 뺀 모든 졸업 사진첩에는 A와 나의 투샷이 박혀 있다. 엄마들끼리도 친하고, 동갑인 남동생들끼리도 잘 안다. 우스갯소리로 가끔 말하는 것처럼 '자동 업데이트' 설정이 되어 있어서 인생의 맥락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사이다.


어느 정도 코드가 비슷한 편이긴 했으나 성격은 많이 달랐다. 짜증이 많은 나와 변덕이 많은 A는 매일 붙어다니면서도 매일 싸웠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괴상한 경쟁심이 발동해 별다른 이유 없이 틱틱거리고 눈을 흘기는 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일이었고 집에 돌아가 엄마 앞에서 울고 불며 걔랑 다시는 안 논다고 진상을 부린 적도 적지 않았다. 둘 다 다음 날이면 전날의 굳은 다짐을 까맣게 잊고 전화를 걸어 지금 집으로 놀러가도 되냐고 물었지만.


어린 시절처럼 싸우지야 않았지만, 어른이 되고서도 A와 나의 관계는 팽팽해졌다 느슨해지기를 반복했다. 일이 바빠서, 마음이 힘들어서, 혹은 서운한 것이 있어서 몇 달씩 안 만나다가도 또 각자 자기 몫의 감정을 해결하고 나면 문득 연락해 아무렇지 않게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웬만한 연애 뺨치게 지지고 볶는 사이 꽤 긴 시간이 지났다. 학교 앞에서 동전지갑을 뒤집어 10원짜리까지 긁어 내서 떡볶이를 사 먹던 A와 나는 치킨에 맥주를 먹고 카드를 긁는 30대가 되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친구를 만나면 매양 그렇듯, 대화의 수준은 학교 앞 분식집에서나 회사 앞 술집에서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동네 술집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어김없이 앞에 놓인 맥주만큼의 영양가도 없는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회사가 어떻고 연애가 어떻고 가족이 어떻고를 가지고 하는 실없는 농담, 만약 돈을 많이 벌면 집에 전속 요리사를 몇 명 둘 것인지 같은, 생산성이 제로에 수렴하는 불량식품 같은 잡담들. 내가 떠들고 싶던 말들의 농도도 딱 그 정도였다.


"아, 너희 집 앵두 진짜 맛있었는데."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는 큰 앵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앵두나무가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 나무가 유독 튼튼했던 것인지 별달리 비료를 주거나 가꾸지 않아도 여름이면 늘 새빨간 열매가 빽빽이 달렸는데, A와 나는 그 철만 돌아오면 앵두 귀신이 되었다. 말캉하게 잘 익은 앵두는 조금도 시지 않고 달콤하기만 했다. 우리는 그것들을 욕심껏 한 주먹씩 따서 물에 헹구어 주워먹었다. 그 집을 떠난 후로는 한 번도 앵두를 먹어 본 적이 없다.


"나 그 때 이후로 앵두를 한 번도 사 먹은 적이 없네. 파는 것도 못 본 거 같애."

"나도."


작은 소쿠리에 담겨 있던 앵두의 빨간 색이 또렷하게 떠오르면서 여러 가지 기억이 소금 통 엎어지듯 확 쏟아져서 잠깐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 너랑 나만 기억하는 그런 순간들이 이렇게 많았지.


나는 A가 무안하거나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할 때면 콧잔등에 힘을 주어 납작하게 만든다는 걸 안다. A는 내가 엄청 튀는 노란색 옷에 남몰래 환장하면서 선뜻 사지는 못한다는 것을 안다.


32년의 삶 중 22년이라는 시간은 유세를 부리기엔 빈약하지만 관계를 오래 된 붙박이 가구 같은 것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손때 묻고 군데군데 흠집도 있지만 그걸 빼 버린다는 생각은 아예 안 하게 되는 그런 것. 싸울 수도 있고 잠깐 멀어질 수도 있겠지만 완전히 잊거나 없는 셈 칠 수는 없는 사람.


A는 내년 초 한국을 뜬다. 한참 킬킬거리다가 별안간 그 사실이 가슴에 세게 박혔다.


"너 가고 나면 이런 게 제일 아쉬울 거 같애."


A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깐 침묵이 흐르다가, 가서 자리를 잡고 나면 내 전용 손님방과 수영장이 딸린 집을 사서 개를 세 마리 키울 거라는 뻘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또 웃었다.



작가의 이전글 선명함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