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스마트팩토리?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목숨을 걸고 빛고을에 잠입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펜터와 그를 돕는 택시운전사인 김사복 씨의 행적을 그린 영화라고 하네요. 저는 송광호 씨 팬이고, 영화 피아니스트의 토마스 크레취만이 보여준 눈빛을 잊지 못합니다. 다만 아이가 너무 어려 영화상영이 끝나고 홀드백이 지난 후 IPTV에 방영이 되어야 볼 수 있다는 슬픈 전설이...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이런저런 수다를 떨던 중 영화 이야기가 나왔고 택시운전사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80년대 광주를 신군부가 봉쇄했기 때문에 타 지역 사람들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것이 가능할까?"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사회학을 전공한 친구는 사회문화조직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며 '봉쇄가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장교로 복무하는 친구는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말해 우리를 갑자기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야겠습니다. 심지어 고향에서 목공업을 하며 지역축제 무대에 사회로 나서기도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지역종합예술인'으로 불리는 친구는 '평소 정신과 마음을 깨끗하게 가다듬으면 온 우주가 도와줘서 봉쇄를 풀 수 있을 것'이라는 신선한 헛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도시봉쇄의 관건은 결국 ICT 기술 인프라의 작동 여부지요. 갑자기 친구들이 모두 저를 봅니다. '명색이 IT 기자인데 이런것도 모르냐'는 눈. 저는 군인들이 도로를 막고 드론을 날려 항공을 시찰하며 통신 기반 인프라를 파괴한 상황을 머리속으로 가정했습니다. 나아가 가설 사설망 서비스에 전자기펄스(EMP) 폭탄 가능성 등 별별 상상을 총 동원한 후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봉쇄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SNS 저널리즘 시대
홍콩 우산혁명 당시 인스타그램이 위력을 발휘했고 중동의 봄 당시 트위터가 맹활약을 펼쳤으며 페이스북은 영국 런던 테러 당시 긴급구호장치로 작동했습니다. 물론 '실제 효과가 있었느냐'는 잘 모르겠습니다. 홍콩은 여전하며 아랍의 봄은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가 중론입니다. 또 하나, 페이스북이 있어도 테러는 일어나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치 최근 온디맨드 사업의 전개과정처럼요.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가 온라인을 중심으로 오프라인으로 진격하던 온디맨드 사업은 최근 공유경제라는 가면을 여전히 쓴 상태에서 조금씩 사업의 핵심이 오프라인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오프라인 거점에서 빅데이터와 사용자 경험 인사이트를 얻어 조금씩 현실의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는 것은 현존하는 대부분의 ICT 플랫폼 사업자가 보여주는 행보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SNS도 언젠가는 오프라인 거점을 확실하게 틀어쥐고 현실을 변하게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보여준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스티브 잡스의 손에서 모바일 생태계가 생명을 얻고, 초연결의 사물인터넷 시대가 ICT 플랫폼 선구자들의 손에서 영혼을 끌어냈습니다. 정치와 사회, 문화 전반에서 SNS는 조금씩 외연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순기능으로만 충만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맞습니다. SNS는 일종의 광장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해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아고라입니다. 페이스북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매개로 소통의 플랫폼을 빠르게 구축하는 것은 이러한 시공간 초월의 아고라를 필요하다면 더욱 생생하게, 가능하다면 자신들의 손에서 만들기 위함입니다. 어차피 플랫폼 사업자는 시장 과점을 목표로 움직이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SNS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며 생각을 접합니다. 이러한 거대한 생각의 연대를 80년대 광주처럼 완전히 끊어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보자
소셜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 기반을 두고 크게 웹 2.0과 UCC의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참여 저널리즘, 크라우드 저널리즘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많은 SNS 기업들은 일찌감치 소셜 저널리즘에 주목했습니다. 왜냐고요? 사람이, 독자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봉쇄가 불가능한 사유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곳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페이스북이 인스턴트 아티클을 가동하는 한편 지난 19일(현지시간) 유료 구독 서비스를 매개로 하는 페이스북 저널리즘 프로젝트를 공개한 이유입니다.
다만 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의 의미, 향후 방향성에 대한 분석은 도처에 넘쳐나기 때문에 저는 다른 말을 하겠습니다. 바로 저널리즘을 넘어선 '콘텐츠의 생성과 소비 동시성'에 대한 담론입니다.
가끔 타 언론사의 기사 중 몇몇 '단독'기사를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엿보입니다.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유명인사가 특정 현안에 대해 자신의 소신을 밝힌 기사인데, 출처를 보면 페이스북입니다. 예를들어 연예인 A씨가 페이스북에 로그인해 '난 B가 싫어'라고 쓰면 처음 이 콘텐츠를 본 기자가 단독기사로 내는 겁니다. '[단독] 연예인 A, B 싫어해 충격...이유는?'이라는 기사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건 무슨...'이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곰곰히 생각해보니 '누군가의 페이스북 글도 기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기사는 소식을 알리고 이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입니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올라온 누군가의 글은 분명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자와 단 둘이 만나 속삭이던 내용만큼의 진실성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물론 기자는 발로 뛰어야 하는 직업이지만, 시대가 변하니 별 신기한 일도 다 생긴다.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언론은 현재 플랫폼 유통 권력을 거의 상실하고 포털의 입만 바라보는 처지에요. 개인의 입장에서는 굳이 언론이라는 플랫폼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많은 전문가들도 이를 잘 알고 있어요.
여기에 대한 평가는 접어두겠습니다. 다만 제가 집중하는 것은 바로 콘텐츠의 생성과 소비의 패턴입니다. SNS라는 거대한 플랫폼은 이제 콘텐츠의 생성과 소비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으며, 심지어 기존 플랫폼의 강자도 이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는 점.
스마트팩토리가 뇌리를 스칩니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이동한 스마트팩토리의 강점 중 하나가 바로 자동화에 따른 생산과 소비의 합일이죠. SCM의 관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아주 유리한 구조이고요. 그리고 이제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SNS는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 심지어 인용과 기생의 단계까지 왔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 있지만 이건 아주 무서운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유기적인 생물이에요. 스스로 생성과 번식, 진화, 변종을 거듭하는 또 하나의 생태계가 심지어 오프라인까지 강하게 치고 들어온다면? 그 파괴적인 영향력에 언론은 자기 이름이나 남길 수 있을까요? 구독이 떨어지고 독자가 보지 않는다..라는 푸념은 사치인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SNS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좀 친해져야 겠어요. 알아야 잡아먹힐때 살살 죽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