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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진홍 Jul 02. 2018

레디 플레이어 원, VR 까는 영화

커뮤니티의 방향성은 페이스북을 연상시킨다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2045년 인터넷 대역폭 파동 등의 이유로 폐허가 변한 근미래를 다뤘습니다.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치 마약을 투약하듯 가상현실 <오아시스>로 접속하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주인공의 좌충우돌 활약상을 담았습니다. 주말 밤에 탱자탱자 놀다가 그렇게 재밌다는데 함 봐야지 싶어 4500원 내고 IPTV로 봤습니다. 쌩둥맞게 정리하고 싶은 대목이 있어, 끄적여봅니다. 영화 리뷰 전문 콘텐츠 제작자가 아닌데다 영화도 잘 몰라요. 이해해주시고 가볍게 봐 주세요.   

 

장면 하나하나에 스며든 도파민 만빵의 음악, 충실한 아재정서에 입이 떡 벌어지는 특수효과, 특히 후반부의 등장한 기동전사 건담은 앉은뱅이도 일어나 박수를 치며 윈드밀을 하게 만들었다는 후문입니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영화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뭔가 이상한 러브라인, 뭔가 이상한 관문 난이도, 뭔가 이상한 우연, 뭔가 이상한 후다닥 결말은 개인적이지만 마음에 드는 편은 아닙니다.    

다만 주인공이 오아시스를 ‘지배’하면서 게임 셧 다운제를 도입한 대목에는 많은 비판이 나오는 것으로 알지만, 이 부분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약간 다릅니다. <오아시스>의 개발자 할리데이는 가상현실도 중요하지만 실제현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인물입니다. 그에 대한 가치판단은 꼰대스럽거나, 혹은 신선할 수 있겠지만 영화의 맥락은 충실히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인공이 내릴만한 판단이라는 겁니다. 저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영화 내내 충만한 아재감성도 따지고 보면 아날로그 시대의 향수지요. 아날로그의 시대는 과학기술과 현실의 감정, 그 경계선에 위치했던 묘한 시대며 영화에서는 ‘좋았고 낭만적인 현실’로 설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본론을 꺼내겠습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가상현실로 시작해 가상현실로 끝나는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가상현실을 비롯한 ICT 기술을 좋게 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화 시작 가장 인상깊게 본 장면은 빈민촌 트레일러 내부에서 가상현실 기기를 착용한 사람들이 각자의 퍼포먼스를 즐기는 장면. 행성만한 카지노가 있고 거대한 에베레스트 산을 품어낸 <오아시스>지만, 막상 <오아시스>를 탐험하는 사람들은 좁고 한정된 트레일러 내부에서 허우적거리는 묘한 딜레마입니다. 현실에 더 집중하자는 영화의 맥락이 극초반에 여실히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나간 해석일까요?    


<오아시스>를 설명하며 엄마와 아이, 학생할 것 없이 가상의 세계에서 죽으면 분노를 터트리며 괴성을 지르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가상현실로 만들어낸 <오아시스>를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역시 현실, 즉 현실의 가치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 막판에 <오아시스>에서 전쟁이 나고 많은 사람들이 돌격전을 벌일 때 현실의 사람들이 위험한 현실의 도로를 맹목적으로 돌격하는 장면도 희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상도 이쁘고 현실도이쁜 여주 얼굴에 점 하나 찍어두고 못생겼다고 말하는 설정은 퍼시발도 화나게 만들고요.   


보안에 대한 풍자도 엿보입니다. 영화의 악역인 놀란 소렌토는 최첨단 장비에 둘러싸인 세계 2위 회사의 경영자지만 비밀번호를 외우지 못해 메모지에 적어두었다가 탈탈 털립니다. 센싱과 동작감지기술로 보강한 강력한 가상현실도 보안 불감증에는 도리가 없다. 재미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영화 초반 주인공 파시벌은 이모 트레일러에서 나와 <오아시스>에 빠져 허우적대거나, 드론으로 피자배달을 받는 남자를 거쳐 줄을 타고 아래쪽 집에 내려오지요. 왠 아줌마를 만나는데 그 아줌마는 <오아시스>에 접속하지 않고 화분의 꽃에 물을 주고 있습니다. 퍼시발과 유일하게 처음 현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인생에 대한 인사를 나누는 사람. <오아시스>로 향하는 퍼시발이 퉁명스럽게 말하는 사람. 그가 키우는 현실의 꽃. 절묘한 씬입니다.    

가상현실을 별로 좋지 않게 보는 영화는 말미에 귀신인지 아바타인지 모를 할리데이를 출연시켜 오래된 어린시절의 추억창고에서 주인공에게 진리를 알려주고 끝납니다. 스필버그가 어릴적 동심과 함께 방을 나가면서 말하네요. 그 동안 내 영화를 즐겨줘서 고마워.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가상현실을 다루지만 거의 러다이트 수준의 감성을 봤다고 생각합니다. 가상현실보다는 현실이 더 가치있다는 영화의 맥락은 그래서 좋았던 아재감성을 지향하지요. 그런데 더 재미있는 대목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타협의 정서입니다.    


가상현실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우리의 소소한 삶의 가치까지 보다듬지 못한다. 영화의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리데이가 숨겨둔 가치는 역시 가상현실에 있고, <오아시스>는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기술임에는 분명합니다. 포기할 수 없는 기술의 진보지요. 버릴 순 없고, 이렇게 빠지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영화의 선택은?    


커뮤니티입니다. 영화 말미 주인공은 놀란 소렌토의 추격을 피하며 외칩니다. “트레일러 빈민촌으로!” 가상현실에서 맺어진 인연과 상황의 전파가 현실의 정의구현으로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가상현실과 현실의 커뮤니티입니다. 즉, 사람들이죠. 영화는 가상현실과 실제현실 모두 커뮤니티의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커뮤니티는, 총을 들고 위협하는 퍼시발을 비록 제지하지 못하지만 충분히 위협이 되어주고, 충분히 왕의 등장을 축하하는 구경꾼이 되어줍니다.    


페이스북 생각이 났어요. 이들은 연결이 아닌, 커뮤니티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가상의 세계에서 단순히 점과 점의 연결로는 플랫폼 볼륨을 키우기 어렵기 때문에 내려진 비즈니스적 결단이겠지만, 생각해보면 가상과 현실의 모든 플랫폼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부작용 대비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일수록 강해지니까요.    


영화 초반으로 돌아가서, 할리데이가 모든 게이머들에게 지령을 내릴 때로 가봅시다. 그는 관에 누워있고 동전 두 닢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네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진 장례절차이자 오래된 인간의 방식입니다. <오아시스>를 통해 눈의 지평선을 넓힌 선구자인 그가 인간의 오래된 장례식에 맞춰 눈이 가려진 대목이 재밌네요. 이후 동전은 사라지고 지령이 떨어집니다. 그 지령은 궁극적으로 단결로 이어져 커뮤니티의 시작이 됩니다. 이 역시 재미있는 영화의 문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그래서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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