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묘한 역사의 아이러니
코로나19로 인해 논란이 큽니다. 그리고 가끔, 역사는 아이러니함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은 돌고 돈다'는 점을 말하기도 합니다. 뭐 중요한 내용은 아니고, 그냥 씁쓸한 미소가 나오는 점이 있습니다.
흑사병과 르네상스
요즘 판데믹이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감염증의 확산 6단계 중 최고단계이며 대유행이라는 뜻인데요. 사실 이 단어는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에서 기인했습니다.
흑사병은 14세기 유럽 인구의 절반을 죽인 공포스러운 전염병입니다. 판데믹이라는 표현이 너무나 어울리는 말 그대로 지옥의 병으로, 페스트균(Yersinia pestis)에 의해 발생하는 급성 열성 감염병입니다.
흑사병의 창궐로 당시 유럽은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가고, 어떤 대비책도 필요없이 모두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소스라치는 파편의 순간들.
당시 사람들은 이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례 그렇듯 신을 찾아 성당으로 몰려왔고 사제들에 매달렸습니다. 중세 유럽이니까요. 그런데 사제들도 흑사병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사제들마저 흑사병으로 줄줄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상상해봅시다.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말 한 마디로 칼을 꼬나쥐고 머나먼 중동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상태에서, 당연히 신이 보호해줄 것으로 믿었던 사제들마저 흑사병에 죽어나간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마음 속 한 귀퉁이에 의심이 들지 않을까요? 그것이 불경스러운 의심이든 합리적인 의심이든 의심은 의심입니다.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곧 신을 의심했고, 다른 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열린 것이 르네상스. 신의 시대가 끝나고 인간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물론 다른 주장도 있습니다. 르네상스의 시대가 신에 대한 의심이 아닌, 신이라는 도피처를 찾기 위한 여정이라는 주장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870년 이탈리아 프라토의 한 저택에서 발견된 다티니 문서에 따르면 1373년 흑사병 당시 거상이던 다티니가 성당에 자신의 종교 미술품을 봉헌해달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흑사병으로 신에 대한 의심이 피어나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마지막 도피처로 여기고 온전히 매달리는 염세적인 문화가 르네상스의 시작이라는 것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르네상스가 거상들의 미술작품 지원에서 시작됐다는 논리에 입각한 것입니다. 다만, 현재로는 신에 대한 의심에서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인문주의가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아이러니
흑사병이라는 공포가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져 인간에 집중하는 르네상스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르네상스는 곧 모험과 자본의 시대로 이어져 대항해시대, 제국주의로 뻗어가 유럽인들의 세계제패를 끌어냅니다. 누군가에게는 역사의 진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죠.
여기서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을 보시죠. 코로나19가 중세 유럽의 흑사병처럼 파괴적인 치사율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또 한국 정부는 투명하고 강하게 대응을 잘 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천지라는 종교단체로 판데믹이 벌어지는 장면은 참 얄궂은 대목입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흑사병, 코로나19를 합리적으로 이겨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신천지라는 종교단체가 이를 방해하는 장면은, 마치 흑사병 시절 믿었던 신도들에게 배신당한 성당의 복수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신천지와 성당이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대비되는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뭐 사실 그런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보란듯이 잘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는 르네상스의 시대에서 시작된 인간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합리적인 이성을 믿습니다. 중세 유럽의 흑사병을 이겨내지 못한 종교라는 믿음에 패할 이유도 없고, 이겨내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방해하면, 좀 시원하게 재끼고 우리의 이성이 강하게 펼쳐지는 시대를 기원합니다.
아, 한가지
마지막으로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중국인 입국금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는데...이건 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인 입국금지를 하면 감염통로를 하나 차단하는 효과는 있겠죠. 또 중국에 체류한 사람들을 못들어오게 하는 것도 역시 효과는 있을겁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기회비용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지금 이 상황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끊으면, 당장 여기에 생계가 달린 사람들은 어떻하란 말입니까. 자기일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 아닌가요?
무엇보다 차단, 봉쇄는 곧 경제적 고립을 뜻합니다. 이건 엄청난 기회비용을 수반합니다. 심지어 중국인 혹은 중국에서 오는 사람을 차단한다고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현실성도 없습니다. 지금 확진자가 어느 지역에, 어떤 단체를 기점으로 나오는지 보면 답이 나옵니다. 제발 부탁하건데, 우리 특정 진영의 프레임에 정처없이 휘둘리지 맙시다. 장사 한두번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