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 IT, 그리고 문화와 세력화
땅 값 이야기가 아닙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 돌입으로 판교 사무실의 공동화 우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판교가 심상치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요동치고 있습니다.
걸그룹부터 정당까지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판교는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ICT 업계의 요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 때 격무에 지친 개발자들이 등대지기가 되어 어두운 밤을 비추고, 어스름한 새벽이 시작될 무렵 하나 둘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는 통에 19세기 영국 런던에 비견되는 새로운 굴뚝사업의 성지로 구르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나아졌습니다.(아마도?)
지금의 판교는 글로벌 패션업계를 강타하고 있는 세련된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힙한 청년들이 지나간 여름을 추억하며 슬리퍼를 끄는, 캘리포니아의 감성을 듬뿍 머금은 젊음의 도시입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금의 판교는 더욱 이채로운 스펙트럼을 뿜어내는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판교만의 정신과 이데올로기로 불리던 힙한 가치들이, 이제는 전국을 강타하며 광폭행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걸그룹 API(멤버 희주, 새벽, 청음, 하루, 다니)의 등장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홀리데이라는 팀으로 활동하며 한 때 국내 가요계에서 커다란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는 아이유와 비슷한 위상을 노렸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아쉬움을 삼킨 가운데, 이들이 1000만 공학도의 마음을 뒤흔들 여신으로 출격해 눈길을 끕니다.
API라는 팀 이름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원래 API는 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즉 운영체제와 응용프로그램 사이의 통신에 사용되는 언어나 메시지 형식을 말합니다. 이러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한 걸그룹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제 판교를 중심으로 하는 젊은 ICT 공학도라는 층위가 곧 새로운 대중의 문화욕구로 소구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벌써부터 반응이 나옵니다. ‘API의 과도한 사생팬은 악성코드라 부르고, 스튜디오 이름은 SDK가 아니냐’는 흥미로운 말들이 개발자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걸그룹 API를 제공하는 서비스인 줄 알았다’는 반응은 양반 수준입니다. 대중의 문화적 소비에는 경계가 없다는 격언이 절로 떠오릅니다.
최근 ‘핫’한 커머스 플랫폼인 당근마켓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야 당근마켓의 서비스 범위는 상당히 넓지만 최초 당근마켓은 판교를 중심으로 작동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왜, 굳이 판교일까?’라는 질문의 답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근마켓이 단순한 중고거래 플랫폼이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하는 온오프라인 플랫폼이라는 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젊고 빠른 ICT 공학도들이 모인 판교라는 특수한 장소에서, 발전하는 기술 만큼이나 트렌드에 민감하고 고립감을 느끼는 이들이 서로의 체취를 느끼기를 원했다면 너무 나간 해석일까요? 술잔을 돌리며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방에서 ‘사랑과 우정사이’를 부르며 집단 속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기성세대의 방식을 거부하면서도, 자기의 행적 하나하나를 SNS에 올려 인정받고 싶어하는 이 고독하면서도 연결되기를 원하는 판교인들에게 당근마켓은 매우 적절한, 또 가장 균형잡힌 소통의 창이었을 수 있습니다.
판교의 문화와 토양이 이색적인 대중문화의 소구, 나아가 전국구로의 꿈을 꾸며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행보를 보이는 가운데 최근에는 아예 정당까지 출현했습니다. 바로 규제개혁당입니다. 네이밍만 보면 유럽 어느 나라의 결사체 기반 정당처럼 느껴지는데,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입니다. 판교를 중심으로 하는 벤처 및 스타트업 기업의 비전을 보호하고 이를 가로막는 정부의 과도한 규제를 개혁하기 위한 정당이기 때문입니다. ‘별 희한한 정당도 다 보겠네’라고 웃어 넘기기에는 이들의 주장이 너무 현실적이며 또 이상적이기 때문에, 미묘한 씁쓸함을 느끼는 것은 덤입니다.
판교 이데올로기
물론 이러한 해석과 분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강력하고 압도적인 파괴력을 자랑하는 현상들로 보기에는 부족하고, 지나치게 지엽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내 정치사를 보면, 특정 지역의 민심을 바탕으로 하는 원리주의적 발상은 많았으나 새롭게 조합된 특정 지역의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나 정신, 문화가 이색적인 향기를 뿜어내는 적은 없었습니다. 이는 판교 현상이자, 판교 이데올로기로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물론, 더 지켜봐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