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쁘다가 아닌, 아쉽다
“손견이 살아 있었다면 조조의 20 장수 중 하나였을 젊은이인 그가, 마왕의 공격을 온 몸으로 오롯이 버텨냈던거야. 그 심정, 그 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제길, 나도 모르게 적벽에 우뚝 선 녀석의 모습을 상상하고 말았군”
쓸데없는 조조 미화로 눈살을 찌푸리지만(조조는 그보다 훨씬 입체적인 인간이죠) 만화 창천항로는 제 인생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단편적인 고전을 이렇게 비틀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만화거든요.
각설하고, 방금 인용한 대목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대충 적었지만 창천항로의 명대사 중 하나입니다. 적벽대전을 끝낸 유비가 손권의 진영에서 술을 마시다 오나라 사령관 주유를 생각하며 내뱉은 대사에요. 엄청난 대군을 맞아 절체절명의 순간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던진 주유를, 유비만큼은(비록 만화지만) 유일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숨막히는 고독을 말이죠.
이세돌과 알파고, 알파고와 이세돌
승부는 냉정합니다. 특히 그 승부에 임하는 주체가 프로라면 더욱 냉정하죠. 승자에게 영광이 돌아가고 패자에게 시련이 시작됩니다. 지켜보는 우리는 감정이입을 할 수 있어도, 승부의 향배를 바꾸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죠.
그 냉정한 무대에서 이세돌과 알파고가 승부를 벌였습니다. 최근 농심배에서 숙적 커제에게 패배해 준우승에 머문 이세돌 9단은 9일 알파고와의 대국에서도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어요. “알파고의 실수조차 의도된 것”이라는 말부터 “이세돌 9단이 방심했다”는 분석까지.
좋습니다. 다 좋아요.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다고 당장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경우는 없겠지만,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담론이 벌어지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입니다. 정책망과 가치망을 바탕으로 최적의 수를 물색하는 알파고의 등장은 ‘알고있다’는 개념에 대한 재정의를 다시 규정할 전망입니다. 일자리 문제, 지배의 담론, 그 외 다양한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전망들.
하지만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을 취재하는 입장에서, 알파고가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직관력을 보여준다거나 이세돌 9단이 전승을 장담하다 뒤로 살짝 물러난 것보다 아쉬운 것은 바로 구글의 행보입니다.지금부터 하는 말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며, 사실관계가 틀릴 수 있습니다.(이해해주셔요~)
구글은 이번 이벤트를 통해 엄청난 홍보효과를 누리고 있으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이득을 누립니다. 물론 이것도 그들의 실력이기에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죠. 하지만 아쉽다고 느끼는 대목은 이미 승부의 판세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대국이 시작되는 점입니다.
아주 미세한 차이가 바둑의 승부를 가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상대 기사의 호흡과 눈빛, 흐트러짐의 찰라를 파고드는 결정적인 한 수가 바로 바둑의 묘미라 알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클라우드, 구름 위에 있는 알파고는 이세돌이 읽어낼 수 없습니다. 알파고도 그렇지 않냐고요? 알파고는 이세돌을 읽어내는 것을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습니다. 이건 인간적인 강점이자 특징이니까요.
다만 요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고요. 다만 8일 기자회견도 그렇고, 9일 대국 전후를 기점으로 이세돌 9단이 계속 등장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인간이 바둑에서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직관력. 이를 받쳐주려면 심리상태가 안정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세돌 9단은, 최소한 제가 보기에 이런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강제로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냥 구글만을 위한 놀이터
이번 이벤트의 승자는 무조건 구글입니다. 바둑업계도 관심을 받는 것 아니냐는 말이 있지만 20년전 IBM의 딥블루에 패한 후 체스업계가 몰락한 것을 반추하면 그리 신빙성있게 들리지 않아요. 이겨도 반짝관심에 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대국의 중심은 바둑이 아닌 인공지능입니다.
물론 구글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에요. 단지 사유의 최고봉을 겨루는 세밀한 감정의 순간, 알파고의 시선이나 호흡을 보여줄 수 없다면(사실 딥블루도 마찬가지죠. 이건 그냥 제 응석입니다) 이세돌 9단의 심리상태를 안정시켜줄 최선의 방법을 보장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공정에 조금 가까운 승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누가 이기든 인간의 승리다”라고 말하려면, 요 정도는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요.
인공지능은?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처음 알파고의 승리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싹했어요.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인공지능은 말 그대로 게임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의 예언대로 인류를 지배하려면 의식이 있어야 하죠. 아마 당분간 무시무시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겁니다.
그러나 한 번 물꼬가 트인 이상 인공지능은 엄청나게 발전을 거듭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의 일자리를 차지할거에요. 특히 알파고는 직관의 알고리즘을 차분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사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수학의 영역에서 인간의 자리를 대체할 가능성은 높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