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살이

엄마의 카스테라

카스테라 냄새가 잊혀진 기억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by 김현정

얼마 전, 손윗 시누이가 어렸을 때 시어머니가 해주셨던 카스테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븐 앞에서 반죽이 부풀어 오르며 내는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동생(지금의 내 남편)과 함께 카스테라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는 형님의 이야기를 전해주자 남편은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내 마음 속에도 따뜻하고 달콤한 카스테라가 있다. 어느 날 엄마가 사오신 둥그런 오븐은 우리 사남매에게 새로운 추억을 선물해줬다. 그 때 엄마가 사오신 오븐은 생선구이에서부터 쿠키에 이르기까지 온갖 음식을 척척 구워내고 버튼만 누르면 스팀까지 턱턱 내놓는 그런 삐까뻔쩍한 물건이 아니었다. 초록색이라기보다 암녹색에 가까운 둥그런 오븐은 어찌보면 촌스럽기까지 한 투박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볼품없어 보이는 그 오븐으로도 카스테라뿐 아니라 좀 더 그럴듯한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반죽만 제대로 만들어넣었다면 그만한 오븐으로 제누와즈를 구워내 생크림을 슬쩍 올려 그럴듯한 케이크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집 주방에 얌전히 놓여 있었던 그 오븐은 우직하게 오직 카스테라만을 구워냈다. 집 앞 빵가게에 가면 언제든 원하는 빵을 집어들 수 있는 시절이었지만 집에서 구워내는 카스테라는 정말이지 특별했다.


카스테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달걀과 밀가루, 우유, 그리고 설탕을 준비해야 했다. 달걀을 그릇 모서리에 살짝 두드려 반으로 가른 다음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하는 과정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흰자에 노른자가 섞여 들어가면 허여멀건하고 묵직한 흰자를 날아갈 듯 보드랍고 푹신하면서도 탄탄한 머랭으로 만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예닐곱 개의 달걀을 흰자와 노른자로 나누고 나면 분업이 시작됐다. 언니는 노른자, 나는 흰자.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흰자는 내 차지였다. 기계의 도움도 없이 거품기 하나만 손에 쥐고서 볼을 뒤집어도 달걀이 흘러내리지 않을 때까지 흰자를 휘휘 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팔이 빠지도록 흰자를 젓고 있노라면 우아하게 노른자를 뒤적이는 언니가 부러웠다. 하지만 흰자가 서서히 부풀어 올라 그릇을 뒤집어도 달걀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품이 탄탄해지면 언제 팔이 아팠냐는 듯 뿌듯한 마음이 밀려오곤 했다.


흰자와 노른자를 고루 섞어주는 건 엄마의 몫이었다. 샛노란 노른자와 구름 같이 폭신한 흰자가 뒤섞이는 광경은 너무나도 황홀했다. 마치 물감처럼 서로에게 곱게 스며든 흰자와 노른자는 아기 병아리처럼 밝고 고운 노란빛을 냈다. 반죽을 오븐에 부어놓고 나면 그때부터 고통스럽지만 설레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엄마가 시작 버튼을 누르고 나면 우리 사남매는 쉴새없이 오븐 주위를 오가며 오븐 뚜껑 한가운데 있는 유리 너머로 빵이 제대로 구워지고 있는지 살폈다.


허여멀겋고 힘 없이 늘어져 있던 반죽은 오븐 속에서 서서히 부풀어 올라 윤기나는 갈색빛을 내며 매혹적인 향기를 내뿜었다. 오븐 속에 들어간 밀가루와 설탕, 우유, 그리고 달걀은 따뜻한 열기 속에서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냄새를 뿜어내며 카스테라로 새롭게 태어났다.


형님의 얘기를 듣고 엄마의 카스테라를 떠올린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멀쩡한 오븐을 굳이 외면해 가며 옛날 엄마의 주방에 놓여 있었던 둥그런 오븐을 닮은 전기압력솥에다 카스테라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밥통 카스테라" 만드는 법을 찾아낸 다음 혹시 머랭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건 아닌지, 잔뜩 부풀어오른 아이의 마음을 실망시키는 건 아닌지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마음으로 카스테라 만들기에 돌입했다.


다행히 흐물흐물한 흰자는 달콤하고 힘 있는 머랭으로 바뀌었고 버터 바른 밥통 속에 들어간 반죽은 갈색빛 나는 먹음직한 카스테라가 되었다. 접시에 담긴 카스테라를 본 남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이 냄새를 맡으니까 옛날에 어머니가 해 주신 카스테라가 기억이 나!" 평소에도 장난과 농담을 즐기는 남편이었기에 나는 으레 농담이려니 했지만 남편의 표정은 진지했다. 남편은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난 듯 제법 촉촉한 눈을 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의 카스테라를 떠올리며 아이들에게 추억을 선물하기 위해 만들었던 카스테라. 그 카스테라가 남편의 기억 저 편 어딘가에 잠자고 있었던 추억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남편의 마음 속에 숨어 있었던 카스테라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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