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둘째를 낳고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할 때였다. 갓 몸을 푼 딸을 대신해 다섯 살 난 손자와 나들이를 나선 엄마는 집 앞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몸에 좋은 반찬거리와 딸기 한 팩을 사 들고 오셨다. 아직 제철이 아니었던 몇 안 되는 딸기가 얌전히 들어 있었던 손바닥보다 조금 큰 투명 플라스틱 상자에는 무려 13,000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신나게 마트를 구경하던 아이는 때 이른 딸기가 진열대에 딱 하나 남아 있는 걸 발견하고선 할머니에게 부탁을 했다.
"할머니, 우리 엄마가 딸기 진짜 좋아하는데... 이거 사 가면 안 될까요?"
해맑은 얼굴로 엄마에게 줄 딸기를 사 달라는 손자의 마음이 그저 기특하고 귀여웠던 할머니는 한두 달만 기다리면 반값에 두 배쯤 되는 딸기를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은 접어둔 채 기꺼이 딸기를 아이 손에 들려주셨다.
마트에 다녀온 아이는 둘째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내게 곧장 달려와 무시무시한 전쟁터에서 적군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빛나는 보석들을 전리품으로 챙겨 온 개선장군처럼 엄마가 좋아하는 딸기를 사 왔노라 자랑을 했다.
작은 상자에 들어 있는 열대여섯 개쯤 되는 딸기를 곱게 씻어 접시에 담아내자 아이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딸기철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첫 딸기를 사 왔으니 아직 퇴근 전이었던 할아버지 몫을 미리 남겨두어야 한다는 할머니 말씀에 따라 네댓 개를 덜어내자 애초에 수북할 것도 없었던 접시가 더욱 휑해졌다.
사실, 우리 집에서 딸기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들아이다. 모든 과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걸 말해 보라면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딸기라고 말할 사람이 바로 내 아들 T군이다. 딸기철이 돌아오기만 하면 마트에서 바쁘게 딸기를 사다 나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딸기 농장에 딸기 따기 체험을 하러 가서는 비닐하우스 안의 뜨거운 공기 탓에 상큼한 느낌 없이 왠지 노곤하게 느껴지는 미지근한 맛의 딸기를 끝도 없이 땀을 흘려가며 먹어대는 T군.
할아버지 몫을 떼어 낸 나머지 딸기를 접시에 내놓자 아이의 손이 분주해졌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딸기를 좋아하지만 몇 알 되지 않는 딸기 앞에서 잔뜩 들뜬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선뜻 딸기를 집어 들 수가 없었다. 딸기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내 입 속에 퍼져나갈 과즙보다는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은 마냥 즐거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불편한 기색이 배어나는 얼굴을 한 아이는 따뜻하면서도 슬픈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엄마도 드세요. 엄마 줄려고 사 온 거예요."
달콤한 딸기맛에 반해 그저 먹기에 바쁜 줄 알았던 아이가 할머니와 엄마는 한 입씩 맛만 보고 그저 손을 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이의 마음은 복잡했다. 며칠 전에 예쁜 동생을 낳은 엄마에게 엄마가 좋아하는 딸기를 맛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엄마에게도 줘야 하고 자신도 먹어야 하는데 그렇잖아도 몇 개 안 되는 딸기가 자꾸 줄어드니까 속상한 마음이 뒤엉켜 있는지 아이의 표정은 복잡했다.
아이가 '엄마에게 딸기를 많이 주지 못하는 미안함'과 '먹어야 할 입은 많은데 딸기가 자꾸 줄어드는 속상함'을 벗어던지고 그저 즐겁고 행복하게 그 해의 첫 딸기를 즐길 수 있도록 나는 기꺼이 아이가 베어 물고 내려놓은 허연 딸기를 집어 들었다. 아직 제대로 된 딸기철이 아니어서 그랬던 건지 상자를 열자마자 상큼한 딸기향이 훅 뿜어져 나올 만큼 신선하고 싱싱한 딸기였는데도 불구하고 매혹적인 붉은색 과육과 초록색 꼭지 사이에 연둣빛과 흰색이 적당히 섞여 있는 것 같은 허연 부분이 제법 많았다. 아이는 딱 보기에도 달콤해 보이는 붉은 과육만 쏙쏙 입에 넣고 꼭지와 가까운 허연 부분은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자식들 입에 제대로 된 생선을 한 점이라도 더 넣어주려고 대가리와 꼬리만 먹다 보니 자식들이 다 커서도 엄마는 생선 대가리와 꼬리를 좋아한다며 엄마 몫으로 따로 챙겨두더라는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되지 않으리라 오래 다짐을 했었지만 딸기가 하나씩 제 입으로 들어가 줄어들 때마다 기쁘면서도 슬프고 미안한 표정을 짓는 아이를 보자 내가 생각했던 육아의 원칙 같은 것은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빨갛게 잘 익어 살짝만 눌러져도 부드럽게 속살을 드러내며 잔뜩 머금고 있던 달콤한 과즙을 뿜어내는 과육이 잘려나간 허옇고 단단한 딸기를 입에 넣었다.
"엄마는 이 하얀 부분이 진짜 맛있는데? 엄마도 딸기 맛있게 먹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먹어!"
그 날의 하얀 딸기는 정말이지 너무도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