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살이

건망증과 치매 사이

그렇게 아줌마가 된다

by 김현정

아이의 재롱에 정신이 팔려 한참을 넋을 놓고 있었다.


주방에서 '드륵 드륵 달그닥 달그닥'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뭐 그러려니 했다. 슬쩍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아이를 품에 안고 물이나 한 잔 마실까 하며 주방으로 갔더니 뭔가가 과하게 달궈졌을 때 뜨거운 열기에서 묻어나는 달갑지 않은 냄새가 가득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돌려 보니 빈 냄비 하나가 잔뜩 달궈져 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기저귀를 갈아주러 아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기 전 차나 한 잔 마실 생각으로 냄비에 물을 부어 불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이.


일단 불을 끄고 밑바닥이 뜨겁게 달궈진 냄비에 수돗물을 들이 붙자 뜨거운 불 위에 자신을 한참이나 내버려 둔 나에게 분풀이라도 하듯 지지직 요란한 소리를 낸다. 냄비를 뒤집어보니 바닥이 제법 거무스름했다. 전기렌지였으니 망정이지 500미리쯤 부어놓은 찬물이 펄펄 끓다가 모두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지날 때까지 가스렌지 위에 냄비를 그냥 올려뒀더라면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사달이 났을지도 모른다.


잔뜩 열이 오른 냄비를 식혀 놓고 나니 냄비 밑바닥이 검게 그을렸다는 것보다, 하마터면 불이 일이 날 뻔했다는 것보다 냄비에 물을 담아 불 위에 올려놓고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사실이 더 걱정됐다.


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깜빡하는 바람에 냄비를 태웠다던가 불이 났다던가 하는 일은 정말이지 드라마에서나 보는 일인 줄 알았다. 어디 라디오나 건너 건너 풍문을 통해서 누가 냄비를 태웠다는 이야기를 듣더라도 다 그냥 하는 소리지 냄비나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고 그걸 잊어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싶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아예 주방의 소리나 냄새를 전혀 인지할 수 없는 곳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주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방에서 달그락 들그덕 하는 심상치 않은 소리를 들었고 반갑지 않은 냄새를 맡으면서도 전기렌지의 불을 최고치로 올려놓고 물을 끓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좀 더 충격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어떻게 불을 켜 놓고 정말 이렇게 완전히 잊어버릴 수가 있지?"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러다 언젠가 리모컨을 냉장고 안에 곱게 넣어두고 리모컨이 없어졌다며 온 집을 뒤집거나 마감해야 할 원고가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은 채 신나게 놀거나 '일심동체'를 '동심일체'라 쓰고도 틀린 줄 모르는 날이 오는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인간에게는 평균 140억 개의 뇌세포가 있다는데 출산을 하느라 뇌세포가 몇 개쯤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뭐 서른이 넘어가면 뇌세포가 조금씩 줄어든다는데 이제 그리 어린 나이도 아니니 나이 탓에 뇌세포가 또 몇 개쯤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나 싶어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게 아줌마가 되어가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