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살이

조연이 어때서

by 김현정

사람은 누구나 주인공을 꿈꾼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은 그 누구보다 빛나고 아름다운 존재다. 모든 상황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주인공의 시선으로 해석되며 모든 사람들은 주인공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움을 주거나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주인공의 존재를 깨닫고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한다.


드라마 홍보 포스터에 서로 먼저 이름을 올리겠다고 여배우들이 다퉜다거나 주연급 배우들이 친한 감독의 부탁을 받고 작은 역할로 영화에 특별출연을 할 때 얼마 안 되는 출연료를 받고 조연에 이름을 올리는 대신 보수 없이 카메오로 출연한다는 연예계 이야기만 보더라도 주인공이 얼마나 탐나는 자리인지 알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만큼은 주연이 되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나도 그랬다.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물론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정신없이 웃긴 인물이 한 명 추가된다고 멜로가 코미디로 완전히 장르가 바뀌지도 않고 싸우는 장면이 하나 더해진다고 가족영화가 스릴러나 액션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육아는 달랐다.


나이는 서른이지만 정신연령은 딱 절반 수준인 순진무구 남편을 만나 하이틴 로맨스와 코미디가 뒤섞인 엉터리 멜로 한 편을 찍으며 결혼도 하고 신혼도 즐겼다. 그 때까지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게 너무도 당연했기에 그 같은 사실을 자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엄마는 뱃속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만 생명에게 혹시라도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매순간 걱정하고 고민하며 모든 결정을 내릴 때 아이의 안전과 안녕을 가장 우선시한다. 열 달은 품은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 '그래도 뱃속에 있을 때가 훨씬 편하다'는 육아 선배들의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임신 중일 때도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음식을 가려먹고 행동 하나하나에도 신중을 기하게 되지만 일단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뜬금없이 장르가 바뀌고 주인공이 교체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엄마를 주연에서 조연으로 밀어내는 아이의 첫 번째 무기는 울음이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뜻을 엄마에게 알리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는 오직 울음뿐이다. 갓난아기가 치아머리 하나조차 없는 선홍빛 잇몸을 드러낸 채 목젖을 바르르 떨면 엄마는 하고 있던 일을 모두 멈춘 후 레이더를 풀가동해 아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낸다.


엄마는 자다가도 아이가 보채면 젖을 물리고 밥을 먹다가도 아이가 변을 보면 달려가 기저귀를 갈아주고 모처럼 바람 좀 쐴 계획을 세웠다가도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모든 일정을 취소한다.


첫째를 낳고 육아에 한창 허덕일 때 엄마가 되니 즐거움도 크지만 주연에서 밀려나 조연이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내 말을 듣고선 화려한 취미생활을 즐기며 매일을 불금처럼 즐기던 동생은 말했다.


"공동주연 하면 되지!"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면 공동주연도 넘보고 성인이 되어 내 품을 떠나면 다시 단독주연까지도 노려볼 수 있겠지만 사실 조연의 삶은 꽤 매력적이다.


내 가슴 속에 이토록 깊고 맑은 사랑의 샘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무척 근사한 데다 누군가로부터 투명에 가까울 정도로 꾸밈없이 순수한 사랑을 받는 것도 가슴 벅찬 일이다.


아직 조연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나는 이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 귀한 시간들을 제대로 즐기며 힘들지만 값진 '엄마살이'를 제대로 해 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