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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Jun 17. 2024

너라는 우주가 내게 온 날

<우주>, 김환기

<우주 5-XI-71 #200>, 김환기

영혼의 행렬

그날, 운동장에서 하늘을 길게 올려다본 건 오로지 구름 때문이었다. 하늘은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있었고, 나는 이전에도 종종 하늘을 보았을 거다. 하지만 딱히 나를 사로잡은 하늘은 없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쳐다본 그날의 하늘이 내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첫 번째 하늘이다.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로 가득했던 그날의 운동장에서 친구는 하늘을 보라며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미세먼지라는 말이 생겨나지도 않았던 시절이라 가을 하늘은 한없이 높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완벽하게 어울릴 정도로 쨍하게 파란 하늘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의 하늘은 온통 하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양털을 쭉쭉 당겨서 얇게 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생크림을 들이부은 것 같기도 한 모양의 구름이 하늘 한쪽을 메우고 있었다. 친구는 내게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중대한 비밀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게 양털처럼 길게, 몽글몽글 늘어선 구름은 사실 하늘을 떠도는 영혼이라고. 하늘나라에서 사는 영혼들이 줄지어 날아가며 우리를 내려다보는 거라고.     


대기권과 우주가 만나는 곳카르만 선

그때부터였다. 아플 정도로 목을 꺾어 하늘을 쳐다보기 시작한 건. 하늘은 나를 설레게 했고 가슴 뛰게 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을 볼 때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자 했던 윤동주가 떠올랐고 노을빛이 내려앉는 시간이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하늘로 돌아가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던 천상병이 생각났다.      


물론 평화롭고 아름다운 상념이 전부는 아니었다. 양떼구름은 영혼의 행렬이라는 친구의 은밀한 속삭임은 나의 거친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하늘을 엷게 뒤덮은 하얀 구름 무리가 보이면 이 세상을 떠난 영혼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며 세상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만 같아 왠지 숙연해졌다. 양떼구름 입자가 유달리 동글동글해 진짜 양 떼처럼 보이는 날에는 땅과 하늘이 뒤집힌 세상에서 거꾸로 뛰어놀던 양 떼가 중력에 이끌려 우수수 땅으로 쏟아지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상상에 상상을 더해 조금씩 쌓아 올린 상상력의 탑은 바벨탑만큼 높아져 어느덧 하늘 끝에 다다랐다. 하늘의 끝에 도달한 상상력이 내게 물었다. 어디까지가 지구를 감싸는 대기고, 어디부터가 우주냐고. 트루먼 쇼의 세트장처럼 바다의 끝과 하늘의 끝이 명확하게 정해진 세상 같은 건 현실에 없다. 그러니, 하늘 어딘가에 지구 대기와 우주의 경계를 가르는 분명한 선 같은 게 그어져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구를 둘러싼 대기와 우주 공간을 명료하게 구분하는 가상의 선은 존재한다. 대기권과 우주의 경계를 정하려고 시도한 첫 번째 공학자 카르만의 이름을 딴 카르만 선(Kármán line)이 바로 그것이다.      


너라는 우주가 내게 온 날

대기권과 우주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보이지 않는 선을 중심으로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하지만 공기의 밀도가 점점 줄어들다 못해 진공 상태가 돼버린 저 멀리 우주 어느 곳에서 빛나는 별 역시 내게는 그저 하늘에서 빛나는 별일뿐이다. 우주에서 시작된 빛은 카르만 선을 넘어 지구로 날아와 우리에게 도달한다.      


서로 다른 두 공간이 어우러져 하나의 완성된 하늘을 만들어내듯 독립된 두 작품이 정사각형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 김환기의 <우주>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도 못할 가느다란 선 양쪽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우주를 보며 내게 찾아온 새로운 우주를 떠올린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저마다의 우주가 있다. 갑작스레 시작된 인터뷰어의 삶은 매일같이 나를 낯선 우주로 밀어 넣는다. 나를 매혹하는 새로운 우주를 찾아 그 우주의 문을 두드리는 일은 두렵고도 설렌다. 나의 우주와 그들의 우주가 보이지 않는 카르만 선을 넘나들며 김환기의 <우주>처럼 같이, 또 따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멋진 인터뷰가 계속되는 내일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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