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외모 속 여린 모습을 형상화하는 김원근 조각가 인터뷰 (1부)
오마이뉴스(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38940)에 지면 관계상 다 싣지 못한 김원근 작가의 진심과 순정 이야기를 2부로 나누어 들려드립니다.
세상에는 겉과 속이 달라서 더욱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매일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또 하루를 살아내는 소위 '사나이'의 순정을 조각하는 김원근 작가의 작품이 그렇다. 미대를 졸업한 후 10여 년 동안 미술계를 떠나 생활전선에서 뛰었던 김원근 작가는 생활인으로서의 경험을 작품에 잘 담아낸다.
아름답지만 멀게 느껴지는 작품보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생활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친근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김원근 작가.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조각품들을 보면 가장 먼저 거친 외모가 눈에 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다가가 유심히 들여다보면 수줍은 듯 여린 미소를 띤 남자들의 눈빛이 작가의 그것처럼 따뜻하다.
진심이 아니면 말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오직 진심만을 담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는 '이 시대의 진심남' 김원근 작가. 4월에 서울 방배동 스페이스 엄에서 열린 초대전 '고진봄래(苦盡春來)'에서 처음 만난 그와 지난 6월 14일, 다시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작가님의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꼽는다면 사랑인 것 같아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사랑은 뭔가요?
"제 작품 중에는 연인 간의 사랑이나 짝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들의 순정을 표현한 게 많습니다. 작품을 보러 오신 분들이 사랑이 뭔지 종종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잘 모르겠다고 답합니다. 정말로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굳이 답을 해보자면, 매일 보고 싶은 마음 아닐까요? 같이 있고 싶고, 보고 싶고 그런 마음이요.
어느 날, 아내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스케치를 하고 있었어요. 아내가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더군요. 제가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니까 아내가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사랑에 관한 작품을 만든다며 웃더라고요. 사실 저는 사랑받아 본 적이 별로 없어요. 제가 어렸을 무렵은 부모님들이 지금처럼 자식을 향해 사랑을 표현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어요. 부모님의 사랑도 못 느꼈고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연애 경험도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여전히 서툴고 사랑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사랑을 잘 모르신다고 하셨지만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작품 주제가 주로 사랑이다 보니 사랑에 관한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습니다. 클래식을 들으면서도 작곡가들의 사랑에 대해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헌신적이었던 외사랑,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곡으로 전 세계를 향해 자신의 사랑을 공표한 베토벤의 뜨거운 사랑이 제게 영감을 줍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사랑은 다 고독하고 힘든 거 같기도 해요. 슈베르트도 캐롤린을 짝사랑했잖아요. 슈만은 나이가 많이 차이 나는 스승의 딸 클라라를 사랑해서 법정 소송까지 갔죠. 제가 사랑을 모르는 탓에 남의 사랑을 빌려서 작품을 하다 보니 제 작품을 통해 표현된 사랑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요즘은 너무 쉽게 사랑을 내뱉고 쉽게 돌아서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잘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니 오히려 사랑이라는 말의 무게를 더 잘 아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아내분의 질문에도 쉽게 답하지 않고 다시 생각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오히려 진짜 사랑처럼 느껴집니다.
"맞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예술가의 길을 걷기 전에 만나서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지금까지 줄곧 저를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비록 사랑이 뭔지 잘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아내를 생각하는 제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아내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작가가 아니었어요. 당시 저는 여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는 숙맥 같은 서른한 살의 노총각이었습니다. 그때는 서른한 살이면 노총각이었어요. 아내는 저보다 무려 열 살이나 어렸죠. 가구 배달일을 하고 있었는데 거래처 사모님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게 됐어요. 첫눈에 아내가 마음에 들었지만 거절이 두려워 감히 사귀자는 말 같은 건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나중에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한 후 아내가 그러더군요. 제가 엄청 큰 사람으로 보였대요. (웃음) 나이 차가 열 살이나 나지만 저희는 아직 서로 존대하고 존중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연애 시절이나 신혼 때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대학 졸업 후 입에 풀칠하고 사느라 11년 정도 작업을 못 하다가 2008년에 성신여대 대학원 조소과에 들어갔어요. 여대지만 조소과는 남자를 받거든요. 학교 로비에서 전시회가 열려서 학교도 구경시켜 줄 겸 아내를 데리고 갔어요. 학교 동기들이 온통 여자들뿐인 데다 다들 저를 삼촌 대하듯 하니까 아내가 무척 재미있어하더군요. 아내는 저의 예술 생활을 넉넉한 마음으로 품어주는 멋진 사람입니다."
아내분이 오히려 더 큰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맞습니다. 작가 생활을 하다 보면 다른 작가들과 밤늦게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그러다 보면 동이 틀 때 집에 들어가기도 해요. 그럴 때면 저를 걱정하고 기다려주는 아내한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듭니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저를 지지해 주는 아내가 아니었다면 제가 이렇게 작가 생활을 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남성 캐릭터가 나온 배경에 관해서 얘기 좀 해주세요.
"10여 년 동안 쉬다가 2008년에 다시 작업을 시작하려니까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
그럼 10년 동안 작품 활동을 전혀 안 하신 건가요?
"졸업 직후에 1~2년 정도 작가 생활을 하긴 했죠."
작가 생활을 관둔 후에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처음에는 돌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했어요. 그런데 일하다가 돌에 손이 깔리는 사고가 벌어졌어요. 그래서 일을 관둘 수밖에 없었어요. 손가락을 안 다쳤으면 석재사업가가 됐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때 제가 일했던 곳이 납골당을 만드는 곳이었어요. 함께 일했던 후배 둘은 계속 그 일을 해서 제법 여유 있게 삽니다. 만약 사고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제가 그곳에서 계속 일을 했다면, 저는 예술가가 되지 못했을 테고 아내도 못 만났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계속 돌고 도는 회전목마 같아요."
요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슬립 장르가 인기가 많은데, 만약 지금 알고 있는 걸 모두 알고 있는 상태로 그때로 되돌아가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사업가의 길을 택하시겠어요, 예술가의 길을 택하시겠어요?
"다시 생각해 보니 손을 다치지 않았더라도 제가 사업가가 되는 일은 없었을 거 같네요. 예술가의 운명은 어떻게 해도 피할 수가 없을 겁니다. 제 내면에는 예술을 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예술을 하지 않으면 뭘 먹어도 채워지지 않고, 뭘 해도 만족할 수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공장을 관둔 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당시, 외삼촌과 이모가 하시는 가구점이 평택에 있었어요. 그래서 가구점에서 일하게 됐고 거래처 사모님이 아내를 소개해 주셨죠.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제가 평택으로 가게 된 일이나 거래처 사모님이 절 좋게 봐주신 일. 모두 아내를 만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던 거 같아요. 마치 미리 짜여 있던 시나리오처럼 제 운명이 정해져 있었던 겁니다."
그럼 다시 캐릭터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작가님 작품 중에 권투선수가 많이 보입니다.
"2008년에 다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뭘 하면 좋을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 무렵에 남자분들이 좋아하는 이종격투기가 막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씨름이나 권투 같은 종목은 좀 지루한데 이종격투기는 동작이 화려하고 쇼의 성격도 짙어서 좀 더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런 분위기 탓에 씨름, 유도 같은 다양한 종목 선수들이 격투기 분야로 대거 넘어갔어요. 권투나 레슬링 선수 출신들은 격투기를 잘했어요. 그런데 씨름 선수 출신들은 그렇지 못했어요. 힘은 세지만 상대를 때려본 경험이 없어서 경기할 때마다 잔뜩 두들겨 맞곤 했어요. 그런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내 인생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캐릭터를 만들게 된 겁니다. 인생의 무대를 링으로 표현했어요."
권투 선수를 조각한 작품에 BMS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던데 무슨 의미인가요?
"복싱멘토스쿨(Boxing Mentor School)의 약자입니다. 제가 뚱뚱한 권투선수 캐릭터를 계속 만들다 보니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어요. “안녕하세요, 작가님. 저는 복싱하는 이광민이라고 합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더군요. 지금은 전재구로 개명을 하셨습니다. 헤비급 권투선수였던 광민씨는 청담동에서 복싱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제가 만든 캐릭터가 본인과 닮았다며 혹시 자기를 모델로 만든 거냐고 묻더라고요. 반가운 마음에 약속을 잡아서 만났습니다.
광민씨는 원래 씨름을 했었는데 아버지의 권유로 종목을 변경했대요. 권투에 입문한 후 용인체대를 갔고 아마추어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 자리까지 올라갔죠. 타이슨처럼 헤비급 선수가 돼서 해외로 나가려고 했는데 허리를 다쳤어요. 어쩔 수 없이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헬스 트레이너가 됐는데 광민씨의 사연을 안타깝게 여긴 고객의 도움으로 권투 도장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지금도 계속 도장을 운영하고 있고요. 광민씨는 저를 위해서 모델이 돼주기도 합니다."
뮤즈 같은 분이시네요?
"네, 맞습니다. 저를 위해서 꽃을 든 모델이 돼주기도 합니다."
겉모습과 달리 이광민 관장님의 눈빛이 매우 선량하고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말씀을 들으니까 제 작품을 조폭 조형물이라고 언급했던 뉴스가 생각납니다. 몇 년 전에 춘천에 작품을 설치했는데, 조폭을 연상시키는 조형물이라며 여기저기서 뉴스가 나왔어요. 그런 뉴스를 보니까 아주 속상했습니다. 생긴 게 거칠다고 조폭은 아니거든요. 제 작품을 너무 오해하는 거니까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소식을 들은 이광민 관장님이 작품 속 캐릭터처럼 꽃을 들고 직접 방송사로 찾아가서 설명하겠다고 이야기하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시선이 속상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런 뉴스가 나온다는 건 제 작품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도 듭니다. 실제로 주변에서 부러움을 표현한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어느 유명한 조각가가 부러움을 표현하길래 도대체 뭐가 부러우냐고 물었더니 자기 작품은 유명하지만 사람들이 그 작품이 자기 작품인 줄 모른대요. 그런데 제 작품 이야기와 제 이름이 뉴스에 함께 나오니까 세상이 저절로 제 이름을 알게 된다며 부럽대요."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