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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Jun 17. 2024

'유리'를 통해 만나는 삶, 사랑, 우주

[인터뷰] 유리를 변주해 현대미술 경계 넓히는 신봉철 작가

신봉철은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미술 작가로 유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실험을 계속해 왔다. 최신 광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색유리 덩어리를 태양 아래 드리우고, 유리병을 깨서 깨진 유리 조각으로 사랑에 대한 시를 쓴다. 전통적인 매체인 유리를 혁신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작품들로 독일 미술계에서 주목받았다.


현재는 관심을 빛, 시간, 우주 등으로 확장시켜 유리라는 매체에 담을 수 있는 주제의 한계를 실험하며 현대미술의 경계를 넓히고 있다. 2024년 4월, 넓은 유리 천창으로 빛이 들어오는 신봉철 작가의 한국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 골목에 공장이 즐비하네요. 외부만 보면 작가님 작업실도 여느 공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문이 열리는 순간 유리로 만든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비밀의 화원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작업실 입구에 선 신봉철 작가 (직접 촬영)


"네, 이곳도 원래 공장으로 사용되던 곳이었습니다. 지난여름,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공간을 손보며 작업실로 만들었습니다. 저 천창이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듭니다. 천창으로 빛이 잘 드니 식물들도 잘 자랄 것 같네요. (웃음)"


- 유리를 매체로 선택한 계기가 있나요?


"유리가 가진 다양한 메타포 때문입니다. 유리는 깨지기 쉽지만 일부러 깨뜨리지 않으면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는 견고한 재료이기도 합니다. 매우 아름답지만 깨지는 순간 날카로운 공격성이 드러납니다.


또한 유리는 고체이지만 액체의 분자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리창은 공간을 물리적으로 나누고 분리하지만 시각적으로는 양쪽의 공간을 통합하죠.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메타포를 미술 작품에서 다양한 은유로 사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너진 파편을 모아 사랑 시와 노랫말을 만들다


▲ One more light 130x90cm, Glass shards, 2021 (사진 제공: 청주시립미술관)


- 이 작품 < One More Light >에 적힌 글귀(Who cares if one more light goes out in a sky of a million stars)는 미국 록밴드 린킨 파크(Linkin Park)의 노래 가사입니다. 원래 린킨 파크를 좋아하셨나요? 작품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실 수 있나요?


"원래 록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많이 듣는 편입니다. 잠시나마 동료들과 밴드 활동도 했었고요. 저 작품을 만들었던 시기에 코로나가 한창이었습니다. 계획된 전시들이 취소되며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가사도 나의 상황이나 마음 상태 등과 맞지 않으면 의미 없이 지나가는데 당시 이 곡의 가사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린킨 파크 보컬 체스터 베닝턴이 노래가 공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생각하면, '저 많은 별 중에서 하나 사라진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라는 말은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도 그저 저 많은 별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생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예술이 인간에게 위로를 준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시큰둥한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많은 음악을 들으며, 예술이 인간에게 주는 위로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 작품엔 이렇게 다소 냉소적인 질문만 적어놓으셨는데 따뜻한 대답이 작품에서 여운으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노래의 뒷부분을 들어보면 'Well, I do'라는 체스터의 대답이 나와요. 마치 그 대답처럼요.


"네, 저도 노래의 그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구절을 들으며 체스터가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작품에 들어간 텍스트들이 인상적입니다. 텍스트는 어떻게 선정하시나요? 책과는 달리 짧은 텍스트를 하나의 작품에 압축해서 담아내셔야 하는 만큼 신중하게 고르실 것 같습니다.


"작품의 텍스트는 시나 노래 가사에서 인용한 것이 많습니다. 제가 직접 쓸 때도 있고요. 텍스트들은 대부분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내가 얼마나 비겁하고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어리석은지 알게 되잖아요. 또 사랑은 내가 얼마나 용감하고 강인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지 알려주기도 합니다.


저의 텍스트 작업은 부서지고 무너져 내린 파편들을 주워 모아 사랑에 대한 시와 노랫말을 적는 것으로, 유리처럼 모순과 패러독스로 가득한 사랑 혹은 삶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I love you even if you don't recognize me 1 130x90cm, glass shards, 2021 (사진: 김윤식)


- < Even if you don't recognize me, I love you >라는 작품을 보면 텍스트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번에 알아볼 수 없게 일부러 감춰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텍스트를 읽으려면 시간을 들여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실제보다 부풀리기도 하고, 상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남녀 간의 사랑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사랑도 존재합니다. 신이 우리한테 주는 사랑, 부모가 자식한테 주는 사랑이 그렇습니다.


이런 사랑은 공기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우리 곁에 있어서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은 시간을 들여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이 작품도 텍스트를 읽으려면 가까이 다가가서 시간을 들여 자세히 봐야 합니다. 텍스트를 가볍게 숨겨서 이런 사랑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 텍스트는 당시 마음고생 중이었던 제 딸을 생각하며 떠올린 겁니다."


- 유리병을 직접 깨서 작업하시는데, 작업하는 중에 다치는 일은 없으신가요?


"망치로 직접 유리를 깨고 때로는 유리칼로 잘라서 원하는 모양을 만듭니다. 이제는 병 깨는 과정에서 다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이 시리즈를 시작했던 초기에는 많이 다쳤습니다. 사랑에 대한 텍스트를 쓰면서 피부가 찢기고 피를 뚝뚝 흘리는 것도 참 아이러니하고 모순적인 경험이었습니다."


- 작품 활동하실 때 주로 어떤 감정을 느끼나요? 시작 단계에서 후반 작업으로 가는 과정에서 감정의 흐름이 달라지기도 하나요?


"작업하는 동안에는 별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건축물을 지을 때 설계 단계에 시간이 제일 많이 걸리는 것처럼 제 작품을 만들 때도 텍스트를 선정하는 등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 시간이 많이 듭니다. 


결정 이후에는 그저 묵묵히 작업을 하지만 때론 제작 과정에서 나오는 우연성이나 변화에 작업을 맡기기도 합니다. 계획과 다소 다르게 작업 과정이 흘러갈 때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작가가 독일을 선택한 이유


▲ Lichtwelle 7 60x68cm, Acrystal & Glass, 2022 (사진: 신봉철 스튜디오)


- 이탈리아도 유리로 명성이 높고 미국도 시장이 큰데 여러 나라 중 독일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대학원 때 유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유리로 작품을 만든다고 하면 대개 글라스 블로잉(glass blowing, 유리를 연화점까지 가열한 다음 입으로 불어서 성형하는 기법)이나 캐스팅(glass casting, 몰드를 만들어 가마에 녹인 후 제작하는 기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건축유리나 스테인드글라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분야는 유럽이 가장 앞서 있고, 세계 최고 수준의 건축유리 예술가, 장인, 공방들이 독일에 모여 있기 때문에 독일을 선택했습니다.


유럽이 세계대전을 겪는 동안 교회도 많이 파괴됐습니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복원할 때 파괴 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할지 당대의 사조에 맞게 재창조할지를 두고 많은 토론이 있었습니다. 독일이나 프랑스의 많은 교회들은 샤갈이나 마티스, 레제 등 당대의 작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했고 그 결과 전통적인 작품과 현대적인 작품이 멋지게 공존하는 곳이 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미술학교에서 유리 페인팅과 납선기법 등 매우 전통적인 기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단 뿌리를 잊지 않은 채 유리예술을 현대 미술의 콘텍스트에 확고히 올려놓는 도전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아직도 그 일이 저 나름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빛과 색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제 작업의 근본이 스테인드글라스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근본은 회화에 있으니 저는 회화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 Stairs of light part 2 115x195cm, glass, 2021 (사진 제공: 서정아트)


- 이 작품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색이 사라지고 측면에서 보면 색이 나타납니다. 유리의 그림자도 달라지고요. 이렇게 아름다운 색의 배합이 심리적 치유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작품의 치유 효과도 고려하시나요?


"저는 치유를 목적으로 작품을 만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보는 사람이 작품을 통해 치유를 받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 된장찌개를 끓이실 때 치유를 위해 만들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집에 와서 어머니의 된장찌개를 먹으며 마음 어딘가가 치유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웃음)"


- 색유리로 만든 Cubes & Stripes 시리즈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텍스트 시리즈가 제 내면과 긴밀히 만나는 작품이라면 Cubes & Stripes 시리즈는 빛에 대한 관심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유리 작업을 하다 보니 빛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빛을 다루다 보니 작업 세계가 커졌습니다.


빛은 태양으로부터 1억 5000만 km를 날아와 어둠을 밝히고, 언 것을 녹이고, 공기를 데워 비와 바람을 일으키고, 땅 위의 모든 생명을 살게 합니다. 긴 여정을 마치고 지구에 도달한 빛이 어떤 벽에 닿기 10cm 전에 제가 개입하는 겁니다. 그 틈에 개입해 색유리에 빛을 투과시키고 굴절시키고 반사시킵니다. 


유리를 통과한 색 그림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느리게 움직이는데 이 움직임은 지구 자전을 가리킵니다. 저는 이렇게 그림자의 움직임을 보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우리 인간이 지구, 태양, 우주와 하나로 연결돼 있음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나의 별에게 80cm diameter, Glass, Wood, Metal, 2023 (사진 제공: 신봉철 스튜디오)


▲ Hocker 45x38x38cm, Wood, Glass, 2021 (Photo by Thorsten Kern-2)


- 혹시 한글로 텍스트 작업을 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10여 년 전에 한글 텍스트 작품도 해봤습니다. 한글 작품도 마음에 들었지만 주로 유럽에서 활동하다 보니 한글로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힘들어서 다시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는 한글 작품을 선보여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다음 전시회가 예정돼 있나요?


올해 예정된 주요 전시로는 6월에 독일 뮌헨에서 진행되는 Galerie Tanit ( https://www.galerietanit.com/ ) 개인전, 9월에 서울 이태원의 갤러리 이알디( http://galerieerd.com/ )에서 진행될 개인전이 있습니다.


유럽이 주 무대다 보니 유럽에서 일정이 좀 더 많습니다. 유럽에서 크고 작은 다른 전시들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을엔 상하이에서도 2인 전을 열 예정입니다."


- 좀 더 많은 사람이 작가님의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앞으로 활발한 전시 활동 기대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마이뉴스 연재 기사 <예술이 내게 속삭이는 말> 3화. '유리'를 통해 만나는 삶, 사랑, 우주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38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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