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부터 북촌한옥청서 개인전 열려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주시경 선생은 "나라말이 살면 나라가 살고, 나라말이 죽으면 나라도 죽는다"라는 말로 한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겨레의 얼이 담긴 말글을 지키려던 선조들의 고군분투가 무색하게 요즘 사람들은 한글을 세련되지 못한 촌스러운 문자쯤으로 치부한다. 간판과 메뉴판이 외국어에 점령당한 지 오래고 어린아이들은 한글을 제대로 깨치기도 전에 알파벳부터 배운다. 여기, 뒷전으로 밀려난 한글을 작품 활동의 전면에 내세우는 작가가 있다.
어린 시절, 한옥에서 느꼈던 따뜻한 포용력을 아낌없이 끄집어내 냉대받는 한글에 온기를 불어넣는 김도영 작가. 그는 우리 겨레의 얼이 담긴 한옥과 한글을 융합해 한글 모양의 한옥을 그리고, 한옥 모양의 한글 글꼴을 만들어낸다. 한국화에서부터 타이포그래피, 설치 미술, 미디어아트, 그림책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 넘나들기도 한다.
한옥과 한글을 주제로 꾸준히 신작을 발표하며 다양한 영역에서 과감하게 새로운 도전을 꾀하는 김도영 작가를 20일 목요일 그의 세종시 작업실에서 만나 봤다.
- 지난 4월 세종시 부강면에 있는 조선시대 고택 홍판서댁에서 내년 전시회를 준비하는 작가님을 우연히 뵌 게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때 진행하신 프로젝트는 방문객들에게 작은 거울을 하나씩 나눠주고 편지를 쓰게 하는 거였어요. 프로젝트가 아기자기하게 느껴졌고, 작가님이 쓰신 동화책 <한글 품은 한옥>에 들어가는 삽화도 작은 그림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작업실에 와보니 작품의 규모가 상당합니다. 지금 작업하시는 건 어떤 전시회를 위한 작품인가요?
"내년에 세종시 홍판서댁에서 진행할 전시회에서 선보일 작품입니다. 올가을에 먼저 쇼케이스 전시를 하고 내년에 전시회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내년 전시회에서는 그동안 제가 추구했던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옥 내 여러 공간을 활용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삶과 일대기를 구현할 예정입니다. 안방은 어머니, 사랑채는 아버지, 건넌방은 자녀, 마당은 온 가족을 위한 공간으로 세분화해 각 공간의 주제와 어울리는 작품을 설치할 예정입니다.
제 그림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옥을 의인화하는 방식을 종종 활용합니다. 안방에는 한국의 어머니를 대표하는 신사임당의 오죽헌을 참고한 작품을 설치할 예정입니다. 그 외 각기 다른 방에도 그 방에 어울리는 '한옥 작품'이 설치될 겁니다. 기자님이 직접 참여하셨던 거울 작품은 놀러 온 마을 사람이 돼 마당에 설치될 겁니다(웃음)."
- 작업실을 둘러보니 활동 영역이 매우 다양해 보입니다. 어떤 활동을 주로 하시나요?
"한국화를 주로 합니다. 대학 때 한국화를 전공했거든요. 그때 사용했던 한지와 분채를 아직도 고집하고 있습니다. 재료에 변화를 주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한지와 분채의 매력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로 그리는 것은 한국화이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을 변주하고 있습니다.
코트라 오픈갤러리가 주최한 기업과 예술인의 협업 사업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돼 장르 확장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당시 제가 만들어낸 작품의 이미지를 활용한 상품 개발 및 디자인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디자인 기업이나 일러스트레이터와 교류하면서 작업의 범위가 한층 더 넓어졌습니다.
그 무렵, 한옥 모양으로 그려낸 한글을 '한옥 한글'이라는 디지털 활자체로 제작했어요. 그렇게 타이포그래피 작업도 하게 됐고 레이저커팅 기법으로 제작한 입체적인 문자를 활용해 설치 작업도 하게 됐어요.
2022년에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한옥담닮'이라는 전시를 하면서 설치 작업에도 눈을 떴습니다. 한옥을 갤러리 삼아 작품을 전시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한옥을 구성하는 각 공간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부엌에 '엄마의 우주'라는 작품을 설치했습니다. 가족을 위해 부엌에서 밥을 짓는 어머니의 사랑과 소망이 하늘의 별과 같이 무한하고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활동 반경이 매우 넓고 작업 결과물들도 다채로운데, 작가님의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단 하나의 주제는 아무래도 한옥과 한글이 될 것 같아요. 한옥과 한글을 하나로 묶어서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육아에 집중하고 해외 생활을 하느라 6년 동안 작업을 쉬었습니다. 귀국 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려니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글갤러리' 전시 공간 지원 공모를 보게 됐습니다. 마침, 아이에게 한옥을 이용해 한글을 가르칠 요량으로 스케치를 해 놓은 작품이 좀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원한 공모에 당선돼 한글과 한옥을 주제로 하는 작업을 이어나가게 됐습니다."
- 4년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온 직후라 한글과 한옥에 전보다 더 강렬하게 끌렸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옥에서 지낸 어린 시절의 기억도 한옥에 애정을 갖는 데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요?
"맞아요. 외국에서 살면서 우리 것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이 생겼습니다. 한국에서 살면서 당연하게 느꼈던 것들이 특별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대표적인 한국 문화인 한글과 한옥에 좀 더 큰 매력을 느낀 것도 사실이고요.
작가의 모든 경험과 환경은 작품 활동의 소재가 돼 예술 세계로 흘러갑니다. 어린 시절, 맞벌이하시는 부모님 덕에 시골 외갓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외갓집의 너른 마당에서 즐거운 상상을 하며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그때 느꼈던 한옥의 온기가 지금의 화폭으로 옮겨진 셈입니다. 수많은 한옥을 그렸지만 제가 그리는 한옥의 마당은 항상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그림을 그렸던 외갓집 마당입니다. 한옥 작품 속 대나무 또한 밤마다 소쩍새가 울었던 외갓집 뒷마당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 오랫동안 구시대적인 거주 공간으로 치부됐던 한옥이 최근 몇 년 새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한옥을 콘셉트로 한 카페도 많고요, 오래된 한옥을 보존하려는 움직임도 늘고 있습니다. 한옥의 어떤 매력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걸까요?
"많은 한옥을 직접 답사하다 보니 한옥이 정말 다채롭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어떤 형태를 띠고 있건 전통 한옥은 하나같이 사람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줍니다. 하늘과 땅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기 때문에 그런 매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 오는 25일부터 북촌한옥청에서 열다섯 번째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 어떤 작품이 소개될지 미리 귀띔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전시는 한옥의 사계절을 다채롭게 표현한 작품 전시와 관람객을 위한 체험 활동으로 구성됩니다. 서울에 있는 고희동 가옥과 창경궁 후원 애련정을 그린 작품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고안한 활자체인 '한옥 한글'로 디자인한 작품 '봄, 여름, 가을, 겨울'도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해 서울로미디어캔버스 신진작가 부문에 선정돼 서울역 근처 전광판에서 선보였던 미디어 작품 '한 걸음마다 하나의 풍경-사계'도 관람할 수 있습니다.
28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는 탁본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 그림책 <한글 품은 한옥> 독자를 대상으로 이벤트도 준비했습니다. 제 그림책을 소장한 사진을 보여주시거나 책을 갖고 오시는 분께는 직접 사인도 해드리고 제 작품 스티커도 증정할 생각입니다."
- 서울로미디어캔버스 선정 작품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대형 전광판에 전시됐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어떤 작품이었는지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서울역 옆 고가도로 공원 쪽에 서울시가 운영하는 미디어아트 전시용 대형 스크린이 있습니다. 2023년에 미디어 부문 신진예술가로 뽑혔고, 제 작품이 다른 선정작들과 함께 상영됐습니다. 모션그래픽을 가미해 한옥의 사계를 줄거리로 하는 한국화 애니메이션(https://youtu.be/_YqW_o-43rg?si=OTHv61Ep6PQ5aoB8)을 만들어냈습니다."
- 이번 전시가 끝난 후에는 또 어떤 계획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올해만 한옥에서 세 번의 전시회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북촌한옥청 전시에 이어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성북동 하코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열 겁니다. 10월 20일경에는 홍판서댁에서 내년 전시를 위한 워크숍과 쇼케이스 전시도 진행합니다. 대전과 세종에서 다른 전시회도 몇 차례 열 예정입니다."
오마이 뉴스에 게재한 기사(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40733)를 개인 SNS로 옮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