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눈물
슬플 애(哀)
슬픔: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에 억지로 삼킨 눈물이 가득 찬 상태.
<성경이 있는 정물>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흐가 그린 그림이다. 성경책은 목회자였던 아버지를, 불 꺼진 초는 아버지의 죽음을 상징한다. 성경 옆에 놓인 노란 책은 에밀 졸라의 소설 <삶의 기쁨>을 그린 것으로, 아버지보다 늘 부족했던 고흐 자신을 나타낸다.
엄마의 눈물
엄마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어쩌면 엄마도 울고 싶은 날이 많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어른이 되고 난 후였다. 딱히 철이 들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다. 살다 보니, 어른이 되면 눈물을 삼켜야 할 때가 많다는 걸 알게 됐을 뿐이다.
그런 엄마의 눈물을 처음 본 건 중학생 때였다. 이제 초등학생만 돼도 한 사람당 하나씩 번호를 갖는 게 당연한 세상이 돼버렸지만, 그때는 한 가족당 하나씩 번호가 있었다. 그날, 엄마와 나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식구들이 어질러놓은 집을 솜씨 좋게 정리했고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괜한 공상에 빠져있었다. 엄마가 오전 내내 분주하게 쓸고 닦은 대리석 바닥은 차분한 공기로 덮여 있었다.
‘따르릉따르릉.’ 인터폰 겸용이었던 크림색 전화기에서 재미없는 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시절의 전화벨 소리는 무조건 ‘따르릉따르릉’이었지만 수화기 너머로 전달되는 내용은 매번 달랐다. 그날의 전화는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거실에 서서 전화를 받던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답지 않았다. 엄마는 늘 강단 있고 흔들림 없는 어조로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너답지 않아’라고 단정 짓는 말이나 ‘너답게 굴어!’라며 강요하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그때는 몰랐다. 그저 엄마의 목소리가 평소의 균형감을 잃고 요동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신경이 곤두섰다.
엄마의 엄마
살면서 처음 본 엄마의 우는 모습은 낯설었다. 엄마가 왜 우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엄마의 눈물을 본 순간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엄마가 슬프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엄마의 감정이 내게 전이된 건지, 어떤 비바람에도 꿈쩍 않는 거목 같았던 엄마가 흔들리는 모습이 두려웠던 건지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엄마의 평온을 산산이 조각낸 것은 외할머니 소식이었다. 소화가 잘되지 않아 병원을 찾은 외할머니가 위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큰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처럼 울었다. 내게 엄마는 커다란 나무처럼 언제든 흔들림 없이 버텨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날, 엄마는 뿌리를 뽑아버릴 듯 거칠게 휘몰아치는 태풍 앞에 선 나무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엄마한테도 한없이 소중한, 그런 엄마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실감했다.
엄마는 다시 원래의 엄마로 되돌아왔다. 할머니가 위암 진단을 받은 후 엄마는 할머니를 챙기느라 몸도, 마음도 조금 더 바빠졌다. 하지만 다시는 울지 않았다. 흔들림 없이 일상을 이어나가며 꼿꼿하게 또 하루를 버텨내는 게 슬픔을 견디는 엄마만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또다시, 눈물
무더위가 절정으로 치달았던 지난 8월,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는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쇼팽 에튀드 ‘나비’가 후텁지근한 여름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엄마였다. 낮게 잠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직감했다. “할머니 돌아가셨어요?” 노환으로 고생했던 할머니의 병세가 급격하게 나빠지던 참이었다.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그럭저럭 평온해 보였다. 올해로 아흔다섯이 된 외할머니가 벌써 몇 년째 노환으로 고생 중이셨으니 모두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순리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나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한 차례 왈칵 눈물을 흘렸고, 장례식장으로 내려가는 차에서도 두어 번 눈물을 흘렸다. 다들 미리 눈물을 흘려서인지 장례식장에서는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호상’이라고 인사하는 조문객도 있었다. 큰 병 없이 장수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흔히들 ‘호상’이라는 말을 한다. 할머니의 나이를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호상’이라는 말은 어쩐지 적당하지 않게 느껴졌다.
외할머니는 항상 허리가 굽어 있었다. 젊을 적 사진을 보면 분명히 허리가 꼿꼿했다. 꽃 같은 나이에 결혼해 고된 시집살이를 견디며 일곱 남매를 키우는 동안 할머니의 허리가 아무도 모르는 새 매일 조금씩 굽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딱 할머니 몸집만 한 나무관에 누워있었다. 항상 굽은 모습이었던 할머니의 등은 새색시 적 사진처럼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 반듯하게 등을 펴고 누운 할머니를 보며 모두 다시 울었다. 나의 엄마는 차갑게 식어버린 자신의 엄마를 애달픈 손길로 쓰다듬으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엄마, 이제 아프지 말고 좋은 곳에서 편히 지내세요.” 울음을 토해내는 엄마를 뒤에서 가만히 안고 같이 울었다. 백 살까지는 거뜬할 줄 알았던 할머니의 나이는 아흔다섯에서 멈췄다. 차가운 할머니 앞에서 서럽게 우는 엄마를 보며 세상에 호상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늘나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는 할머니가 허리를 쫙 펴고 새색시처럼 신나게 걸어 다니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