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약한 농담의 끝
2019년에 출간된 김기창 작가의 <방콕>은 나의 허를 찔렀다. 방콕에 가본 적은 없어도 인터넷이나 여행잡지에서 방콕의 화려한 모습은 숱하게 봤다.
세계적인 유명 호텔 체인들이 곳곳에 들어선 도심.
동남아의 뜨겁고 습한 대기가 안기는 불쾌감이 순식간에 잊히는 청량한 수영장에서 한가롭게 더위를 즐기는 여행객들.
서로 물총을 쏘아대며 신나게 웃는 얼굴들. 한여름의 석양이 내려앉은 아름다운 짜오프라야강.
대형 불상이 있는 사원.
어딜 가나 싸고 맛있는 음식.
동남아 특유의 과즙이 꽉 찬, 그래서 그곳으로 여행 다녀온 사람들을 하나같이 ‘동남아 앓이’ 하게 만드는 싱그럽고 탐스러운 과일.
내가 생각하는 방콕의 모습은 대략 이 정도였다. 어디를 가나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여행객들이 넘쳐나고, 인생의 고민쯤은 간단히 제쳐놓고 ‘카르페 디엠’을 외치며 순간을 즐길 수 있는 향락의 도시.
한가롭게 식당에 앉아 밥을 먹는 사람들이 그려진 책 표지를 보고는, 딱 그 정도의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그러나 소설 <방콕>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여유롭고 화려한 방콕의 포장지를 갈가리 찢어발겨 방콕의 민낯을 폭로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훙이다. 장갑차와 탱크 부품을 만드는 한국 공장에서 일하는 베트남 노동자 훙. 이주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위태로운 불법 체류자의 신분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각각의 삶이 있고 그들의 삶은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명제에서 당연한 듯 예외가 되어버리는 그런 존재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윤사장에게 훙은 그저 맡은 일을 잘 해내는 성능 좋은 기계 같은 존재일 뿐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훙의 정교한 솜씨를 언급하며 작가는
“그라인더 숫돌이 튀어 나가 무엇을 자르고 지나갈지 몰랐다(13쪽).”
라고 적었다.
비극의 전조 같아 아슬아슬했다.
예감은 적중했다.
무엇을 자를지 몰랐던 그 그라인더 숫돌은 결국 시간 외 근무를 하던 훙의 세 손가락을 앗아간다. 그렇게 비극이 시작된다. 날아가 버린 훙의 손가락은 눈먼 폭탄이 되어 많은 사람의 삶을 거칠게 휘젓는다.
미국, 베트남, 태국, 한국. 네 나라에 흩어져 있던 등장인물들의 삶은 훙의 그것과 맞물리는 지점에서 급류에 휩쓸린다. 휘몰아치는 물살은 여러 인물의 삶을 거칠게 움켜쥐고선 방콕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훙의 삶과 공장주 일가의 삶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인 묵직한 이야기에 홀린 듯 빠져들어 그야말로 단숨에 책을 읽어 내려갔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윤사장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훙을 찾아야 한다고. 훙이 범인이라고. 훙은 방콕에 있다고.”
일을 하다가 세 손가락을 잃은 훙을 윤사장은 매몰차게 내보낸다. 몇 달 치 월급을 쥐여주고는 그만하면 자신이 웬만한 사람보다 낫다고 자신한다.
윤사장이 훙을 내보내는 이유는 그럴듯했다.
“내가 보고 있기 속상해서 그래요.”
윤사장이 그 알량한 불편함을 참지 않은 탓에 훙과 얽힌 많은 사람은 반짝이는 포장지가 벗겨진 날 것 그대로의 방콕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을 맞게 된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방콕을 해석한다.
손가락이 날아간 훙을 홀대하고도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윤사장. 그녀에게 방콕은 ‘넓은 아량으로 베푼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외노자가 숨어 사는 거지 같은 도시’일 테다.
윤사장의 아들 정우에게 방콕은 ‘사랑하는 미국 여자 섬머가 인간에게 학대당하는 코끼리를 구출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이 가려는 도시’이자 ‘그녀의 아버지 벤이 젊은 태국 여자 와이와 살을 맞대며 사는 도시’이다.
정우의 연인인 섬머는 아버지와 동거 중인 젊은 여자 와이에게 말한다. “방콕은 마치 편안한 농담 같아요.” 섬머의 말을 들은 태국 여자 와이는 지나치게 순진한 그녀의 말에 속이 배배 꼬인다. 와이는 거칠게 답한다. “방콕이 농담 같다면 고약한 농담이겠지”라고.
농담 같았던 방콕에서 섬머는 폭탄 테러를 겪고 아버지를 잃는다. 그 모든 일이 벌어진 후 섬머에게 방콕은 어떤 도시가 되었을까? 여전히 편안한 농담 같은 도시일까? 혹은 중년의 백인 사내가 실컷 재미만 보고 방콕을, 자신을 완전히 떠나버릴까 봐 늘 불안해하던 와이처럼 방콕을 고약한 농담이라고 여길까?
방콕에서 유유자적한 휴가를 즐기는 내 모습을 이따금 상상했었다. 소설 <방콕>은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로 지어 올린 내 상상 속의 방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방콕의 주인은 신나는 낮과 황홀한 밤을 끝없이 이어가며 마음대로 방콕을 소비하는 여행객이 아니다. 푼돈을 내밀고 거들먹거리며 도시를 유린하는 여행객들 뒤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도시. 그곳이 방콕이다.
한 권의 책을 단숨에 읽어가는 내내 하나의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들 중 과연 무죄인 자가 있을까?”
불법 체류자라는 이유로 훙의 존엄을 짓밟은 윤사장.
자신의 존엄이 짓밟혔다는 이유로 윤사장의 딸, 정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훙.
훙에게 농락당한 삶을 되찾고 말겠다는 마음 하나로 처음 보는 말레이시아 노동자의 얼굴에 물을 끼얹은 정인.
동물을 사랑하는 연인 서머의 마음은 이해하면서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고난에는 무관심한 정우.
학대당하는 코끼리를 구조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험천만한 상황 속으로 밀어 넣고 오직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서머.
언제든 쉽게 현지의 젊은 여자를 갈아치울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같이 사는 여자 와이에게 절반의 진심만 내어주는 서머의 아버지 벤.
그런 벤을 붙들고 싶어 뱃속 아이까지 과감하게 지워버리고는 모두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여자 와이.
훙이 보여준 진심과 진실을 절반만 믿고 그의 인생을 난도질한 채 달아난 여자 린.
주요 인물에서부터 스쳐 지나가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장인물의 행적을 낱낱이 살펴보면 무죄라 할 만한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다 물세례를 맞은 말레이시아 남자 하나뿐인 듯했다.
방콕의 진실을 알지도 못한 채 그저 겉모습만 동경했던 나 역시 또 한 명의 유죄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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