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나에게로의 초대
거센 폭풍처럼 순식간에 마음을 헤집어놓는 책이 있는가 하면 사납게 요동치는 정신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책도 있다.
<월든>을 처음 펼쳤을 때, 나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거칠게 휘몰아치는 삶의 속도에 떠밀려 휘청대고 있었다. 당장 해치워야 할 수많은 일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사방으로 흩어져 마구잡이로 뻗어나가는 어처구니없는 삶의 가닥들에 붙들려 이리 휘청, 저리 휘청대는 심정이었다.
이 책을 썼을 때 나는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 마을 근처에 있는 월든 호숫가의 숲 속에 집 한 채를 지어 홀로 살고 있었다.
짧고 강렬한 첫 문장으로 독자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기교와는 거리가 먼 문장이다. 그러나, <월든>의 첫 문장을 읽는 동안 요란하게 들썩이던 내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월든 숲에 작은 오두막 한 채를 짓고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발자취를 따라 온갖 자연의 소리가 들려오는 숲으로 걸어 들어갈 준비를 했다.
소로가 누군지는 몰라도 대개 ‘월든’이라는 단어에는 익숙할 것이다. 언제부턴가 ‘월든’을 꿈꾸는 사람이 많아졌다. 언젠가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삶의 터전으로, 모든 인간이 돌아가야 할 원초적인 고향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이상향으로 ‘월든’을 꼽는 사람이 많다.
<월든>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월든'은 하나의 장소인 걸까, 아니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삶의 방식인 걸까?
그 둘 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월든은 장소이기도 하고,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50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책 속에 담긴 긴 이야기는 사실 <월든>의 첫 문장에 모두 응축돼 있다. 사람들이 꿈꾸는 하나의 장소로서의 이상향은 인적 드문 월든 호숫가의 숲, 그리고 그곳에 있는 한 채의 오두막이다. 월든이 상징하는 정신적인 이상향 역시 이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직접 숲 속에 집을 짓고 자연 속에서 홀로 고독을 즐기며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꿈꾸는 정신적인 이상향이다.
사실, 월든은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을 나아가게 하는 가장 큰 힘을 가진 단 하나의 단어가 바로 ‘왜’ 아니던가! 오랫동안 미뤄둔 숙제처럼 내 마음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었던 <월든>을 끝까지 읽어내고 싶었다. 그리하여, 도대체 왜 사람들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다 함께 ‘월든’을 외치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월든>에 새겨진 그의 정신을 단 몇 문장으로 요약해 적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소로는 국민들이 낸 세금이 전쟁 비용으로 쓰인다는 이유로 인두세 납부를 거부해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노예제 폐지에 앞장설 정도로 사회 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거기에다 낚싯줄을 이용해 월든 호수의 깊이를 직접 측정하고 공자나 맹자 같은 동양 철학자들의 사상을 두루 이해할 만큼 지적으로 뛰어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소로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상에서 벗어나 직접 자신의 철학을 실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도끼 한 자루를 메고 숲으로 들어가 직접 집을 지은 소로는 1845년 7월 4일부터 1847년 9월까지 2년 2개월 동안 월든 호숫가에서 홀로 살았다. 최소한의 살림만으로 소박하고 간소하게 살았던 그의 느리고 고요한 한 시절에 사람들이 매혹되는 건 정신없이 흘러가는 도시의 속도에 지친 탓인지도 모른다.
소로는 끝없이 물질적인 풍요를 탐닉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며,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라고 외친다. 언행일치가 안 되는 사람들의 말은 제아무리 그럴듯하게 꾸며져 있어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지 못하지만, 소로는 그야말로 말하는 대로 산 사람이기에 그의 말은 사람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진다.
월든 호숫가에 직접 지은 오두막에 그가 들여놓은 살림살이는 단출했다. 침대와 탁자, 책상 각 하나씩, 그리고 세 개의 의자가 가구 전부였다. 그는 그곳에서 매일 아침 “희석하지 않은 순수한 아침 공기 한 모금”을 들이마시며 인간이 마땅히 그래야 할 모습 그대로 숲을 거닐고 자연을 느끼며 삶을 즐겼다.
‘삶이 얼마나 간소해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저마다의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기는 하다. 사람에 따라, ‘침대씩이나 있었는데, 비바람을 막아줄 집도 있었는데……. 어쩌면 그의 삶이 좀 더 간소해질 수 있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소로가 작은 오두막에서 호사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삶을 살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한겨울에도 해가 드는 시간에는 집에 불을 때지 않았고 나중에는 빵을 구울 효모조차도 소유하지 않은 간소한 삶이었다.
어떤 책에서 젊은 남자와 노인의 대화를 읽은 적이 있다.
젊은 남자는 강가에서 물고기를 낚는 노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좀 더 많은 물고기를 낚을 수 있도록 애써 보는 건 어때요?”
노인은 답한다.
“좀 더 많은 물고기를 낚으면 뭐가 좋지요?”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된다.
“배를 살 수 있지요.”
“배를 사면 뭐가 좋지요?”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지요.”
“더 많은 물고기를 잡으면 뭐가 좋지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요.”
“더 많은 돈을 벌면 뭐가 좋지요?”
“한적하게 강가에 앉아 유유자적 낚시나 하며 살 수 있지요?”
“나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걸요.”
<월든>을 읽으며 오래전에 읽었던 노인과 젊은이의 대화가 떠올랐다. 현대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야말로 ‘주객전도’다. 더 큰 집을 짓고,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더 화려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끝없이 노동하고 그 노동에 삶을 쏟아부은 후 삶이 모두 어디로 갔냐며 탄식하는 우리의 태도에 일침을 가하는 <월든>.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200년도 지난 먼 옛날에 태어난 한 철학자의 말에 이토록 귀를 기울이는 건 어쩌면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현대인들은 본질과는 거리가 먼 골치 아픈 경쟁과 탐욕스러운 물질로 가득한 삶에 떠밀려 휘청거리며 살아간다.
그런 삶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현대인들은 정글이나 시골에서 찍은 관찰 예능을 보며 힐링의 순간을 갈구한다. 180년쯤 전에 쓰인 <월든> 역시 이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지도 모른다. 매 순간을 온전히 누리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소로의 삶을 책장 밖에서 가만히 관찰하는 셈이다.
우리는 끝없이 ‘월든’을 꿈꾼다.
닿을 수 없기에 더 간절한 고요함을,
너무 멀기에 더 그리운 단순한 삶을.
<월든>은 그렇게 우리를 숲으로 초대한다.
그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어쩌면 내 안으로 좀 더 깊이 파고드는 사유의 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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