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 아름다운' 드라마를 보고
※ 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해숙(김혜자)은 고낙준(손석구 ) 없이 환생했다. 24번째 만의 싱글 환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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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번째 삶을 끝내고, 천국에 온 해숙에게 천국 방송이 물었다.
“다음 생애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살잖아요. 재밌을 것 같고, 큰 영화제에서 상도 타보고 싶어요."
그러나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것임을 고낙준은 알고 있었다. 낙준은 해숙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목표를 23번이나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 생애도, 자신 때문에 해숙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것이 카르마다.
고통을 주는 낙준이라는 원인과 고통을 받는 해숙이라는 결과.
그리하여 고낙준은 해숙에게 24번째 환생은 자신 없이 혼자서 환생하라 설득한다. 나는 여기에서 해숙이 혼자 가지 않겠다고 할 줄 알았다. 40년씩이나 반신불수였던 낙준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던 남편바라기 해숙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해숙은 수긍하고 홀로, 당차게 환생한다. 드라마 전체에 흐르는 초현실적인 설정에 비해 무척 현실적인 결정이다. 드라마니까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 상상력과 공감, 재미를 얻을 수만 있다면.(적어도 내게는)
결국 해숙은 24번째 윤회에 낙준 없이, 성공적인 삶을 산다. 그녀가 마지막 호흡을 하는 이곳은 특급 병실. 병풍처럼 쭉 늘어선 가족들이 보인다. 보나 마나 그녀는 원하던 대로 멋진 연기자로 살았으리라. 그리고 마지막 순간 해숙을 데리러 천국에서 내려온 낙준.
"여보, 나 어땠어?"
해숙은 전생의 남편이었던 낙준에게 이번 삶을 평가받고 싶어 한다. 인간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강렬한 인연이나 중요한 정보는 다음 생애에서도 감(感)으로 알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낙준을 기억한 걸까?
하지만 곧 해숙은 낙준에게,
"잘 살았지만, 당신 없이는 안 되겠어"
라고 말하고, 낙준도
"나야말로"
란 말로 해숙을 그리워한 시간을 고백하며 드라마는 끝이 난다.
요즘 가장 핫한 남자, 손석구와 40년 이상 나이 차가 나는 원로 배우 김혜자의 러브 스토리라니. 작가님, 너무 무리한 설정 아닌가요? 어쩌려고 그러는지...
왜냐면 외모가 주는 선입견이 얼마나 높은지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생기고 못생기고, 젊고 늙고의 차이로 인간의 가치가 매겨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성형외과부터 화장품, 다이어트까지 외모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들은 날마다 개발되고, 소비된다.
심지어 천국마저도 그렇다. 죄다 젊은이뿐이고, 할머니는 해숙 혼자다. 천국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는데, 모두 자신의 청년기 모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해숙만 죽기 전 모습 그대로인 이유는 남편 말을 믿어서다. 아니 속아서다. 남편은 나이 든 해숙이 제일 이쁘다고 했기 때문. 할머니가 되면 살아온 세월만큼 현명하고 지혜로울 줄 알았는데, 해숙은 그냥 몸만 늙고, 마음은 늙지 않아 망했다.(<폭삭 속았수다>의 애순(문소리) 대사 같기도 하다.)
하지만 회를 더 할수록, 해숙의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과 숙성된 인생의 필살기-요리와 다양한 경험에 끌려 외모가 가려진다. 그리고 어느새 해숙과 낙준의 해피엔딩을 응원하게 되었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천국보다 아름다운' 것은 '진심, 혹은 사랑'인 걸까?
사실 해숙의 싱글 환생으로, 두 사람 모두 카르마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고통의 인연을 끊고 정화된 영혼이 되어 천국보다 한 단계 높은 ‘해탈’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은 인연(카르마)을 다시 선택했다. 카르마를 끊기 위해 인간은 지옥 유황불에 타기도 하고, 현생을 가시 길같이 고통스럽게 보내기도 하고, 여튼 죄다 죽어나게 힘들어하는데... 이런 내세관을 보여주는 드라마에서 둘의 선택은 무척 무모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숭고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 해숙과 낙준은 서로가 '천국보다 아름다운' 존재였나 보다. 그들은 카르마마저 끌어안고, 그들의 카르마를 '천국보다 아름다운' 로맨스로 승화시켰다.
문득, 지금 내 옆에 있는 그와 나는 몇 번의 윤회를 거듭해서 만났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본 적 없는 그에게, 뜬금없이 물어본다.
“여보, 다음 생애에 나 다시 만날 거야?"
"또, 또, 드라마에 빠졌구만."
남편이 피식 웃는다. 나는 이 상황이 재밌어서 웃는다. 우리는 이 대화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