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English!

영어와 나, 첫 만남의 기억

by 김현정

너와 나의 첫 인사

학창 시절의 나는 공부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적게 들인 노력에 비해 그 결과는 대체로 좋았지만, 공부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었을 뿐이다. 그랬던 내게도 좋아하는 과목이 딱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영어였다.


영어는 내게 ‘점수를 잘 받기 위해 마지못해 공부하는 시험 과목’이 아니라 ‘괜히 궁금해서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언어’였다. 내가 번역가가 돼 영어를 지금까지 끌어안고 살게 된 건 아무래도 영어의 첫인상이 퍽 강렬했던 탓인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파벳을 익히고, 초등학생이 되면 <해리포터> 원서쯤은 가뿐하게 읽는다. 혹은 가뿐하게 읽어야 한다는 윽박지름에 못 이겨 그런 척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내가 학생이었던 시절에는 중학생이 돼야 학교에서 정식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공부에 관심 깨나 있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영어 학원으로 향했다. 슬슬 영어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던 어느 날, 엄마가 물었다. “너도 영어 좀 배워볼래? 잘 가르치는 학원이 있대.”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러잖아도 친구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영어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한 칸짜리 영어 학원

영어 학원은 어떤 곳일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영화 속에서만 들어봤던 영어를 배우는 곳이라니, 미국 영화에 나오는 근사한 공간이 떠올랐다. 정장을 멀끔하게 차려입고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빗어 넘긴 선생님이 버터 향기 가득한 발음으로 나를 맞아줄 것만 같았다.

엄마 손을 잡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 찾아간 학원은 내 상상과는 정반대였다. 너저분한 회색 창틀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미닫이문을 열면 학원이 나왔다. 시장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오징어채나 멸치를 살 작정으로 시장에 들른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건어물 가게 같은 모습이었다.


영어 학원.jpg



“엄마, 학원이 왜 이래?”


너무도 초라한 겉모습에 순식간에 흥미가 떨어졌다.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은 학생들만 가르치는 좋은 학원이라는 엄마의 설명이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다. 드르륵 문을 열자 두어 평이나 될까 싶은 좁은 강의실이 나타났다.


‘에계. 이게 뭐야.’하고 거듭 실망하려는 찰나 머리가 반쯤 벗어진 중년의 남자가 어깨선이 축 늘어진 허름한 양복을 입고 반갑게 인사했다.


가까스로 붙들고 있었던 기대는 마지막 조각까지 모두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칠판 위에서 시작된 반전

어느 골목에나 있을 법한 허름한 동네 보습학원이었다. 그러나 첫 수업에서 만난 ‘그 글씨’는 남달랐다. 열 명 남짓한 학생을 자리에 앉힌 선생님은 알파벳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며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써 내려갔다.

필기체_칠판.jpg 출처: Pixabay


선생님은 글씨를 쓴다기보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 한없이 낯설고 꼬불꼬불한 글자를 차례차례 적어 내려갔다. 둥그렇게 말렸다가 부드럽게 펴지는 아름다운 글씨체였다. 칠판에 적힌 글씨를 따라 적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그림을 그리듯 알파벳을 연결해 필기체로 단어와 문장을 적어나가는 느낌이 너무도 황홀했다. 낯설지만 매혹적인 이 글씨체를 흉내 내면서, 나는 영어와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나는 첫눈에 반해버렸다.



호기심에서 애정으로

하늘거리며 서로 아슬아슬하게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필기체 문장들이 나풀거리며 내게 날아든 순간, 영어를 향한 나의 호기심은 강렬한 애정으로 바뀌었다.

인생이란 결국 타이밍인지도 모른다.

내게 딱 필요한 순간에 다가온 무언가가 나의 운명이 되어버리는 일.


번역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 건 어쩌면 딱 내가 원했던 순간에 내 앞에 나타난 필기체 때문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억지로 끼워 맞춘 궤변같이 들리는 게 싫어서 지난 시간을 뒤지고 또 뒤져 봐도 아무래도 영어를 향한 내 사랑의 출발점은 내 품속에 날아든 필기체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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