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도 국적이 있다

어디에서 왔니, washroom

by 김현정

화장실, 너의 이름은

몇 해 전, 조카와 함께 뉴욕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조카는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졌다. 두리번거려도 화장실은 보이지 않았고, 급한 마음에 근처 직원에게 물었다.


“Excuse me, where can I find the toilet?”


조카의 몸짓이 제법 다급했기에, 빨리 위치를 알아내고픈 마음밖에 없었다. 그래서 ‘화장실’을 생각하는 순간 머릿속에 가장 먼저 탁 떠오른 단어, 'toilet'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직원은 친절한 표정으로 화장실이 어디인지 안내해줬다.


문제는 나오고 나서였다.


“이모, 왜 그렇게 말해? 왜 toilet이라고 해?”


이모 왜 그렇게 말해.jpg


조카의 한마디에 나는 순식간에 주눅이 들었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조카는 캐나다에서 태어나 10년을 산, 말 그대로 ‘네이티브 스피커’였다.


그렇다. 네이티브 스피커 앞에서는 번역가도 쭈그러든다.


마음이 급할 땐 나오는 대로 말해놓고, 뒤늦게 생각에 돌입했다.


‘toilet이 변기라서 안 되는 걸까?
아닌데.
toilet에는 ‘변기’라는 뜻도 있지만 ‘화장실’이라는 뜻도 있는데.
아.
toilet은 영국식이구나.
여긴 미국이니까 restroom이라고 물었어야 하는 건가?’



TMI. 미국 영어에서는 화장실을 bathroom, 혹은 restroom으로 나누어 부릅니다. bathroom은 집, 호텔 방 등 개인적인 공간에 있는 화장실을, restroom은 공원, 식당 같은 공공장소에 있는 화장실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말이야~”라고 답을 하려는데 조카는 이미 전시된 공룡을 보러 달려가고 없었다.

그렇게 조카가 던진 질문은 내 마음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잊혔다.




캐나다에서는 이렇게 불러요

그로부터 3년 후.


몇 년간 캐나다에서 살면서 조카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마침내 알게 됐다.


캐나다 화장실에는 특별한 이름이 있다.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나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 바로 ‘손을 씻는 일’을 생각하면 이름을 쉽게 추리할 수 있다.


캐나다 화장실의 이름은 바로 ‘washroom’이다. ‘볼일을 보고 나서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기 하니까’, ‘캐나다 사람들은 대체로 좀 더 청결해서’ 같은 문화적 이유를 덧붙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다. 어쩌다 보니 화장실을 ‘washroom’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늘어났고 그런 문화가 고착돼서 캐나다에서는 화장실이 ‘washroom’이 됐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으로 보인다.



TMI. 캐나다에서도 공공장소에 있는 화장실은 washroom이라고 부르되 개인적인 공간의 화장실은 bathroom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washroom’이라는 단어는 1850년경 미국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제 ‘washroom’이라는 단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캐나다 영어는 대체로 미국 영어보다 영국 영어와 닮은 점이 많은데도 ‘washroom’은 영국 사람에게도 낯선 단어다.


영어 사용자들은 누군가가 ‘washroom’이라는 단어를 쓰면 단번에 이렇게 추측한다.


‘오~ 캐나다 사람이군!’


절대로 섣부른 짐작이 아니다. 캐나다의 정부 사이트나 관계 법령 사이트에서도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washroom’이다.


ontario_e_law.jpg 온타리오 법률 사이트에 나와 있는 공공 화장실 관련 규정



반쪽짜리 화장실도 있어요

캐나다에서 집을 구하려고 부동산 사이트를 뒤지다가 화장실 때문에 또 한 번 놀란 적이 있다. 바로 0.5개짜리 화장실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2.5 bathrooms.jpg
2.5 bathroom_realtor.ca.jpg



‘화장실이 2개면 2개, 4개면 4개지, 도대체 2.5개, 4.5개는 뭘까?’


북미 가정에 있는 ‘half bath’, 즉 ‘0.5개짜리 화장실’‘욕조 없이 오직 변기와 세면대만 있는 화장실’을 뜻한다. 북미의 주택은 대개 현관문과 가까운 일 층 화장실이 반쪽짜리 화장실로 꾸며져 있다. 외출했다 들어와서 간편하게 손을 씻기도 편하고, 손님들이 사용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딘가 묘하다. 화장실을 뜻하는 ‘bathroom’의 원래 의미‘욕조(bathtub, 혹은 bath)가 있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욕조가 아예 없고 오직 변기와 세면대만 있는 공간을 ‘half bath’라고 부르는 것은 ‘더는 기차가 오지 않는 역’을 여전히 ‘기차역’이라고 부르거나 ‘밥알이 한 톨도 안 들어간 키토 김밥’을 계속 ‘김밥’으로 부르는 것처럼 어딘가 어색하다.


그러나, 언어는 생명력을 가진, 살아 있는 존재다. 언어의 출발점에서는 분명한 의미가 있었더라도 그 언어가 진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명확했던 테두리가 모호해지기도 한다. ‘bath’가 없는데도 여전히 ‘half bath’라고 불리는 건 어느 순간 언어가 최초의 테두리를 벗어나 문화의 힘을 자양분 삼아 발전을 거듭하는 탓이 아닐까.


이제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국적을 섣부르게 짐작하지 말자. 모든 언어에는 지문이 있다. 똑같은 영어처럼 들려도 영국식 영어, 미국식 영어, 캐나다식 영어, 호주식 영어는 모두 미묘하게 다르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그들의 뉘앙스와 발음, 단어에 관심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그 차이를 눈치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면,


영국에서는 toilet,

미국에서는 bathroom, 혹은 restroom

캐나다에서는 bathroom, 혹은 wash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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