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 아니, ARRÊT?

STOP을 STOP이라 부르지 못하는 땅

by 김현정


Hello의 땅을 지나 Bonjour의 땅으로

세계 어디든 ‘정지’할 때 쓰는 그 익숙한 빨간 표지판.

그런데, 그 STOP 표지판을 보고

“STOP은 틀렸어, ARRÊT가 옳아!”라고 주장하는 곳이 있다.


그곳이 어디일까?


힌트는 Bonjour의 땅이다.


프랑스?

아니, 퀘벡(Québec)이다.



캐나다, 언어 이중생활 중입니다

한국은 한국어, 일본은 일본어, 중국은 중국어, 프랑스는 프랑스어. 미국은 영어.


대부분의 나라에는 대표 언어가 하나쯤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둘 이상의 공용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많다. 공용어가 가장 많은 나라는 짐바브웨다. 헌법이 인정하는 공용어가 무려 16개에 달한다.


짐바브웨에 비하면 캐나다의 언어는 한없이 단순하다. 공용어가 영어와 프랑스, 단 둘뿐이니 말이다.


캐나다 총리가 국정연설을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똑같은 말을 영어로 한 번, 곧이어 불어로 한 번, 반복해서 연설하는 모습이 기억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두 언어를 대하는 캐나다의 태도는 제법 진지하다.


optimize 캐나다 총리 마크 카니의 연설_@뉴스1



<도깨비> 덕에 더 유명해진 그곳, 퀘벡

보통 ‘프랑코폰(francophone)’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어 사용자들은 퀘벡에 모여 산다. 드라마 <도깨비>에 나온 바로 그 퀘벡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래된 유럽 마을을 연상케 하는 낭만적인 그 드라마 속 퀘벡은 퀘벡주(Quebec Province)의 주도인 퀘벡 시티(Quebec City)다. 퀘벡주를 대표하는 또 다른 도시로는 ‘북미의 파리’라고 불리는 감성 충만한 도시, 몬트리올이 있다.


영어과 프랑스어 모두 공식 언어이긴 하지만 그 위상은 확연히 다르다. 캐나다에는 총 10개의 주(province)와 3개의 준주(territory, ‘주’에 비해 제한적인 권한만 갖는 특별 지역)가 있다. 대부분이 오직 영어만 공용어로 인정하는 반면 프랑스어만 공용어로 인정하는 주는 퀘벡 하나뿐이다.


퀘벡 배.jpg
퀘벡 거리.jpg
퀘벡_호텔.jpg
퀘벡 시티 풍경_@김현정



오타와, 영어와 프랑스어가 공존하는 도시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는 온타리오주에 속해 있다. 온타리오주 전체의 공용어는 영어, 딱 하나다. 그래도, 수도는 수도다. 오타와는 수도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영어와 불어를 공정하게 사용한다.


심지어 유치원에는 영어 담임과 프랑스어 담임이 한 명씩 배치된다. 한국에서 어린이집에 다니다가 캐나다 유치원에 들어간 딸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시에 배우느라 한동안 고생깨나 했다.


“봉주르 꼬망 싸바~ 봉주르 꼬망 싸바~”하는 프랑스어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를 때는 한없이 귀여웠지만, 한국어와 영어, 프랑스어를 동시에 달고 사는 삼중언어 생활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다리 하나 건넜을 뿐인데...


ontario_quebec.jpg


다리 하나만 건너면 세상이 바뀐다. 온타리오주가 아닌 퀘벡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퀘벡 쪽 단풍이 온타리오 쪽 단풍보다 화려하고 근사하다는 소문을 확인하려고 다리를 건넌 날, 단풍보다 나의 눈길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STOP’ 표지판이었다.


팔각형 빨간 표지판에 ‘STOP’이라는 하얀 글씨가 새겨진 바로 그 표지판 말이다.


오타와의 표지판은 공명정대하다! 한 나라의 수도답게 ‘STOP’이라는 영어와 ‘ARRÊT’라는 불어를 공평하게 함께 나란히 적어둔다.


느긋하게 흐르는 오타와강을 가로지르는 알렉산드라 다리를 지나면 퀘벡의 관문 가티노가 나온다. 다리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 언어가 달라진다. 오타와와 가까운 쪽 도로에는 길 곳곳에 영어와 프랑스어가 병기된 ‘STOP/ARRÊT’ 공용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퀘벡 깊숙이 들어갈수록 영어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표지판에는 오직 ‘ARRÊT’라는 프랑스어만 적혀 있을 뿐이다.


퀘벡주의 공용어는 프랑스어니 당연한 일이다 싶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정지’ 표지판은 어떨까?


뜻밖에도 프랑스어의 본고장인 프랑스의 ‘정지’ 표지판에 적힌 글자는 대개 ‘ARRÊT’가 아닌 ‘STOP’이다. 1968년에 채택된 도로 표지 및 신호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 따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STOP’을 사용하는 것이다.



퀘벡은 왜?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편의를 위해 기꺼이 ‘STOP’을 택하는데, 영어 사용자가 76%(프랑스어 사용자 21%, 영어/프랑스어 사용자: 18%)에 달하는 ‘사실상 영어의 나라’인 캐나다에서 퀘벡은 왜 프랑스어를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일까?


프랑스어를 지키기 위한 프랑코폰의 노력은 눈물겹다. 2021년, 캐나다의 국적기인 에어캐나다 CEO 마이클 루소가 “불어를 쓸 필요성을 못 느낀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비난의 포화에 휩싸였다. 에어캐나다는 기내에 프랑스어 표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하고 공식 사과를 한 적도 있다.


프랑스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한때는 ‘이등 시민’ 취급을 당했던 캐나다의 프랑코폰. 한때는 핍박과 멸시를 상징했던 프랑스어를 굳건히 지켜냄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싶은 걸까?


프랑스의 문화와 언어를 지키는 데 사력을 다하는 퀘벡인들의 노력을 보면, 어쩌면 ‘내가 누리는 무언가가 당연하지 않다’라는 깨달음이 그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의 원동력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캐나다 #퀘벡 #오타와 #프랑스어 #영어 #stop

keyword
이전 11화우리 집에서 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