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했던 음식, 완벽하지 못한 번역-‘쿨 투수’ 나왔습니다
일본 오사카에는 서울로 치면 강남이나 홍대쯤에 해당하는 우메다라는 지역이 있다. 볼거리도 많고, 한큐 백화점, 다이마루 백화점 등 쇼핑할 곳도 많고 맛집도 많은 힙하디힙한 곳이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번화가 한쪽에 자리 잡은 우메다역 한큐 터미널 빌딩 17층.
그곳에는 야키니쿠 무한리필 맛집이 있다. 운이 좋으면 높이가 106m에 달하는 오사카의 명물, 헵파이브 대관람차가 느긋하게 돌아가는 모습도 눈에 담을 수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불판에서 지글지글 고기가 익어가는데 바깥 풍경이 무슨 상관이야?’ 싶을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원래 직관의 묘미는 남다른 법이다. 늘 밑에서 위로 올려다만 보던 대관람차가, 딱 내 눈높이에서 천천히 돌아가는 광경은 퍽 신선했다. 오사카의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가 다시 보랏빛으로 서서히 바뀌자 그 하늘을 배경 삼아 느릿느릿 돌아가는 거대하고 붉은 대관람차에도 불이 들어왔다.
야키니쿠는 식탁 위에 화로를 놓고 즉석에서 구워 먹는 일본식 고기구이다. 오랫동안 육식을 멀리했던 일본에 고기를 구워 먹는 한국의 식문화가 전파돼 야키니쿠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넘어간 음식이니 야키니쿠가 한국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건 어쩌면 ‘우리 것’을 향한 본능적인 애착인지도 모르겠다.
4박 5일 일정 중 무려 두 번이나 찾아갔을 정도로 일행들의 만족도가 높았던 그 야키니쿠 식당. ‘무한리필’을 앞세운 식당답게 두 시간 동안 원하는 메뉴를 마음껏 골라 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식당의 세심한 ‘무한리필’ 정책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손님들은 테이블에 설치된 패드로 원하는 것을 편하게 주문할 수 있었다. 사실 손님 입장에서는 원하는 게 있을 때마다 일일이 직원을 부르는 게 번거롭기도 하고 눈치가 보이기도 한다. 직원 입장에서도 쉴 새 없이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고객의 주문을 일일이 받는 게 힘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식당답게 메뉴는 여러 언어로 번역돼 있었다. 한국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한 창밖 풍경을 간간이 내다보며 한국어 메뉴판을 켜놓고 마음껏 음식을 주문했다.
메뉴판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갈빗살, 치맛살, 안심, 등심은 말할 것도 없고 홋카이도산 감자 요리 같은 지역 특산품까지 고루 갖춰져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비빔밥, 순두부찌개, 미역국, 나물 같은 한식 특화 메뉴에서부터 파르페, 소르베 같은 후식 메뉴까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
남의 나라 한복판에서 한국어 메뉴를 클릭하는 것만으로 원하는 메뉴를 순식간에 받아들 수 있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새로운 음식을 주문하려고 메뉴판을 뒤지던 중 눈에 띄는 메뉴를 발견했다.
이름하여, ‘쿨 투수.’
한국어로 ‘쿨 투수’라고 적힌 메뉴를 보며 ‘도대체 이게 뭘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한국어에는 ‘쿨 투수’라는 말이 없다. 고개가 저절로 갸웃거려졌지만 이럴 때는 그래도 ‘한국어 네이티브’라는 자신감이 팍팍 솟아난다.
웬만큼 배가 불러서인지 직업병이 발동했다. 그러고 보면, ‘금강산도 식후경’이 맞긴 하다. 배가 불러야 이성적인 고민이 시작되니 말이다.
아무래도 ‘쿨 투수’는 오역의 결과라는 게 내 짐작이었다.
아마도 시작은 ‘cool pitcher’였으리라. 영어 단어를 있는 그대로 따져 보면, ‘cool pitcher’는 ‘시원한 물이 담긴 물병’이 될 수도 있고, ‘멋진 투수’가 될 수도 있다.
‘냉수가 담긴 물병’이 한국어로 ‘쿨 투수’가 된 건 아무래도 맥락 없는 번역의 결과가 아닐까.
먼저, 일본 사람들이 ‘냉수가 담긴 물병’을 ‘cool pitcher’라는 일본식 영어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다음, 그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결과가 '쿨 투수'이리라 나름 짐작했다.
번역기는 주어진 단어를 고민 없이 기계적으로 번역한다. 번역기의 성능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아직은 인간만큼 뉘앙스와 디테일을 세밀하게 찾아내지 못한다.
냉수가 담긴 주전자를 뜻하는 ‘cool pitcher’의 ‘cool’은 일본에서도 많이 쓰는 ‘쿨’이라는 단어 그대로 번역하고, ‘pitcher’는 ‘물병’ 대신 ‘투수’로 번역한 결과가 아닐까? (물론,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번역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번역기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할 수밖에...)
잠깐의 고민 끝에 쿨 투수 버튼을 눌렀다.
한 주전자 분량의 물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들이 가져온 건 아니나 다를까 시원하게 얼음까지 들어 있는 냉수였다.
무엇 하나 빠질 것 없이 완벽했던 식사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준 ‘맛있는 오역’이었다. ‘쿨 투수’에 담긴 물을 시원하게 들이켜며 이 멋진 오역의 세계의 끝은 어디일지 새삼 궁금해졌다.
1. 자매품으로 ‘잘잘하게 각자부담(더치페이의 한국어 번역)’도 있다.
더치페이를 '잘잘하게 각자부담'으로 번역한 건 오역은 아니다. 사실, 딱 알맞은 귀여운 번역처럼 느껴진다. 좀 더 그럴듯하게 표현하자면, 한국에서 실제 사용되는 표현을 알지 못한 탓에 생겨난 '어색한 번역' 정도가 옳을 것 같다.
2. 영어에서는 ‘시원한 물이 담긴 물병’을 ‘cool pitcher’라고 부르지 않는다. 야키니쿠 식당의 메뉴판에 적힌 ‘쿨 투수’를 영어로 표현하려면 ‘a pitcher of cold water’ 정도로 적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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