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AT READ ENJOY

[READ] 타운하우스

벽을 맞댄 타운하우스처럼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들

by 김현정

며칠 전, 새벽까지 미련을 떨며 원고를 붙들고 있다 곯아떨어졌다.

잠에서 깨어나 반쯤만 정신을 차린 후 생각 없이 뽑아 든 책이 <타운하우스>였다.



글이라는 건 참 제멋대로여서, 쓸 땐 괜찮은 것 같았는데 다시 읽어보면 영 아니다.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치다 보면, 맨 처음 쓴 글은 한 줄도 남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그런 점에서 번역은 조금 낫다. 작가가 충분히 고민하고, 편집자가 피땀 흘려 완성한 책인 만큼 기본적인 얼개나 논리는 대개 탄탄하다. 나는 옮긴 글에만 집중하면 되니, 직접 내 글을 쓰는 것보다는 자유롭고 책임도 가볍다.


나는 마감일보다 적어도 하루쯤은 앞서 작업을 끝내려 애쓰는 편이다. 하지만 며칠 전 넘긴 번역 원고는 마감 직전에서야 간신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마감이 코앞이었을 때 열감기를 앓느라 며칠 동안 컴퓨터를 켜지조차 못했던 탓이다.


번역 원고를 첨부해 ‘SEND’ 버튼을 누르고 나면 늘 허전하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싶은 아쉬운 마음과 ‘드디어 끝났네’하는 홀가분한 마음이 뒤엉켜 그야말로 시원섭섭한 마음이 밀려든다. 시원한 마음만 있을 때도 있고 섭섭한 마음이 더 클 때도 있다. 글에 대한 애정이 클수록 섭섭한 마음이 커진다. 몇 달 동안 마음에 깊이 품었던 한 세계를 떠나보내는 마음이랄까?


이럴 때 가장 위로가 되는 건 아무래도 독서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떠다니던 말을 컴퓨터 위에 모두 쏟아낸 뒤, 책 위에 인쇄된 활자들을 읽으며 그 빈자리를 채우는 셈이다.




전지영 작가의 <타운하우스>

재미있다는 추천 문구를 보긴 했지만, 내용은 전혀 몰랐다. 그저 ‘타운하우스’라는 단어를 보고는 캐나다에서 살았던 타운하우스가 자연스레 떠올라 그때의 추억 값을 치르느라 충동 구매한 책이었다.


나는 단편이나 중편을 모아놓은 소설집보다는 장편소설을 더 좋아한다. 짧은 글을 읽다 보면 막 예열을 끝낸 다음 본격적으로 오븐을 돌리려는데 두꺼비집이 통째로 내려가 버린 듯한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야기에 적응할 만하면 끝나버리니 어쩐지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타운하우스>가 여덟 편의 단편을 모아놓은 소설집인 줄 알았더라면, 아마 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별생각 없이 펼쳐 든 <타운하우스> 속의 단편들은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도 묘하게 얽혀 있었다.

캐나다의 타운하우스는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타운하우스’와는 다르다. 한국에서는 건축업자가 넓은 부지를 사들여 똑같이 생긴 단독 주택을 여러 채 지어 ‘타운하우스’라는 이름을 붙이곤 한다. 반면 캐나다의 타운하우스는, 똑같이 생긴 여러 채의 집이 주르륵 길게 늘어서 옆집과 벽을 공유하는 일종의 공동 주택이다. 마치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들처럼, 벽을 맞대고 나란히 선 형국이다.


겉보기엔 모두 똑같다. 길쭉한 롤케이크를 정확하게 잘라놓은 듯, 크기도 모양도 흡사하다. 똑같은 벽, 똑같은 창문, 똑같은 대문, 똑같은 앞마당, 똑같은 드라이브웨이.


하지만 그 문 너머에서는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진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이 책에 <타운하우스>라는 제목을 붙인 건지는 모른다. 어쩌면 단순히 첫 번째 소설 <말의 눈>의 배경이 제주도 타운하우스라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어쩌면 ‘인간의 삶 자체가 일종의 타운하우스’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첫 단편 <말의 눈>을 이미지로 표현 (generated by ChatGPT)


- 학교 폭력을 당한 딸과 함께 제주도로 떠나 타운하우스에서 살아가는 수연.

- 해군 관사에서 벌어지는 군인 부인들 간의 묘한 신경전을 불편해하며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윤진.

- 아들이 물에 빠져 죽던 날, 남편이 함께 아들을 찾으러 다니지 못했던 건 모두 사격장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새로 생긴 사격장에서 매일같이 사격 연습을 하는 혜경.

- 어시장에서 안과를 하며 불법과 편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은애.

- 부자들이 모여 사는 청한동 저택에 드나들며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수백만 원씩 용돈을 버는 김승민, 혹은 장신영.

- 그런 그녀의 동선을 몰래 좇으며 그녀의 택시콜을 집요하게 낚아채는 남자.

- 청한동 6길 23번지에 있는 삼 층짜리 붉은 저택에 세 들어 사는 여고생.

- 철거를 앞둔 동도 시영아파트에 작업실을 차려 놓고 늘 비슷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

- 그녀의 작업실에 얹혀살면서도 꿈을 내려놓지 않는 이선.

- 동급생인 태이와 사귀다가 무엇 하나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학교 폭력 사건으로 학교를 관둔 선우.

- 해전 제철소가 폐쇄된다는 소식에 절망한 남편과 선우를 데리고 신도시로 떠나는 엄마.



각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간다. 모든 인간에게는 단 한 번의 삶이 주어지지만, 그 삶을 영위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겉보기에는 똑같이 생긴 집 안에서 어떤 사람은 매 순간을 충만하게 보내고 옆집 사람은 간신히 숨만 넘긴다.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면 인간의 삶이 타운하우스다. 거죽은 닮았지만 그 속은 전혀 다른 타운하우스. 사람들의 삶도 누군가의 삶과 맞닿아 있다.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만 보면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비슷해 보이는 허울을 걷어내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제야 보인다.


<타운하우스>를 이루는 여러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집의 형태도 저마다 다르다.


- 외관은 근사하지만 물이 새는 타운하우스.

- 묘한 동지 의식과 언제 배척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해군 관사.

- 높게 담장이 둘린, 일부러 들여다봐도 마당 잔디나 한 움큼 보일 뿐인 저택.

- 곧 허물어질 시영 아파트.

- 도시를 지탱해온 제철소가 문을 닫으면 생명력을 잃게 될 지방 아파트.


동네.jpg


전혀 다르게 생긴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예기치 못한 균열과 틈.

그 앞에서 위태롭게 오늘을 버텨내는 사람들.

그들의 아슬아슬한 불안과 희미한 슬픔을 <타운하우스>에서 만날 수 있다.


#타운하우스 #북리뷰 #책리뷰 #북캉스 #북케이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READ]고립을 넘어,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