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힘: 그곳에서는 타인과도 친구가 된다
‘똑똑.’
고요하게 햇살이 쏟아지는 한낮,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한참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던 중이었다. ‘초인종이 고장 났나? 요즘 누가 노크를 해?’하며 몇 시간째 의자에 붙어 있던 무거운 엉덩이를 힘겹게 들어 올리려는데 바깥이 조용해졌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노트북 화면 위를 떠다니는 글자들이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 ‘아…. 어째 번역은 하면 할수록 더 어렵네.’ 하며 절망에 빠져드는 찰나 다시 소리가 들렸다.
‘똑똑.’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 대문을 향해 걸어가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참! 이 동네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2012년 겨울, 세종에 막 이사했을 무렵이었다. 한때 연기군으로 불렸던, 충청도 한복판의 낯선 분지. 친구는커녕 반경 100킬로미터 안에 그 흔한 지인조차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눈 덮인 황량한 벌판뿐이었다. ‘도시’라는 이름표를 붙이기에는 모든 것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곳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묵직한 철문을 두드리는 낯선 노크 소리에 나는 움츠러들었다.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경직됐다. 노트북 모니터 앞에서는 느릿느릿 멈칫대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층간 소음 때문에 누가 찾아온 건가? 이렇게 조용한데 그건 말이 안 되지….’ ‘스님 행세하면서 쌀 시주 받으러 다니는 사람인가?’ ‘물 한 잔만 부탁한다면서 집으로 들어와서 사이비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나갈까, 말까. 없는 척할까?’ 어떤 방법이 제일 나을지 혼자 머리를 굴리는데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잡상인이면 냉정하게 돌려보낼 거야!’라고 마음을 먹어서인지 내 목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옆집이에요.” 한껏 들뜬 다정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삿날 잠깐 인사를 나눴던 옆집 여자였다. 덜컹 문을 열자 짙은 핸드드립 커피 냄새가 훅하고 밀려 들어왔다. 커피잔에서는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갓 내린 커피였다. “집에서 일하신다길래, 내리는 김에 한 잔 더 내렸어요.” 친근하게 웃는 얼굴도 다정했다. “일하시는 데 방해될까 봐 일부러 벨 안 누르고 노크했어요.”
닫힌 문 뒤에서 망설이는 동안 ‘도대체 누가 대문을 두드리는 거지?’라는 의문은 의심이 됐고 문밖에 선 사람은 경계의 대상이 돼버렸다. 하지만 대문을 여는 순간 의심의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사실 나는 감탄했다.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왜 문을 두드렸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단숨에 내놓는, 정말이지 완벽한 이웃 아닌가!
어떤가? 이쯤 되니 ‘그 옆집 여자 틀림없이 뭔가 불순한 목적이 있는 게 틀림없어!’라는 확신이 드는가? 혹은, ‘역시 아무나 함부로 믿으면 큰일 난답니다’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빌드업같이 들리는가? 합리적 의심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당황스러운 반전도, 목 막히는 고구마도 없다. 굳이 장르를 따진다면, 세종이 진짜 도시로 발돋움하는 동안 그 안에서 육아 동지로, 엄마로, 친구로 함께 울고 웃는 성장 드라마에 가깝다.
요즘 사람들이 이웃을 대하는 자세는 냉랭하기 짝이 없다. 바싹하게 말라 손가락만 갖다 대도 부스러질 정도로 건조하다. 뭐,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사실 도시인의 삶이 삭막해진 지는 한참 됐다. 록그룹 넥스트가 ‘쫓기는 사람처럼 시곗바늘 보면서 (중략) 함께 있지만 외로운 사람들 (중략) This is the city life.’라는 노랫말로 도시의 외로운 삶을 노래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다. 도시인들이 이제 시곗바늘 대신 스마트폰만 쳐다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없이 삭막한 도시, 그리고 그 한가운데 우뚝 선 아파트.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수천 명이 한 건물 안에서 공존한다. 인구밀도는 높지만 모두가 서로를 경계할 뿐 다정한 이웃은 드물다. 301호라든가 902호 같은 숫자판이 붙어 있는 대문만 닫아버리면, 외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다. 사람들의 일상에서 이웃은 다소 번거롭고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부족한 주차 공간을 놓고 눈치 게임을 벌여야 하는 경쟁자. 층간 소음을 유발하는 분노 유발자. 이게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머리에 새겨진 이웃의 현주소다.
나도 비슷했다. 엄마가 만든 김밥이나 부침개를 들고 아파트 계단을 총총거리며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사할 때마다 소꿉친구와는 연락이 끊겼고, 한때는 진짜 이모보다 자주 만났던 ‘동네 이모들’은 다시는 볼 수 없는 남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이웃에서 시작한 동네 친구는 이사 가면 끝’이라고 나도 모르게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커피 한 잔 줄래요?”라고 묻는 대신 갓 내린 커피를 예쁜 잔에 담아 들고 나타난 그녀는 좀 달랐다. 그녀의 손에 들린 음식은 스파게티에서 김밥, 만두로, 그 종류가 점점 다양해졌다. 우리가 함께하는 곳도 우리 집에서 옆집, 아파트 놀이터, 도서관, 공주, 부여, 대전 등으로 점점 확대됐다. 이제 그녀와 나, 모두 세종 첫 집을 떠나 각자 다른 동네로 이사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잘 지낸다. 캐나다와 프랑스, 지구 정반대에 각자 자리를 잡고 사는 동안에도 우리의 ‘찐친 바이브’는 건재했다.
어쩌면 그날 그녀가 제대로 두드린 건 우리 집 대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건넨 커피잔에 담겨 있었던 게 커피만은 아니었다. 커피와 함께 그녀가 건넨 건 나를 책상 밖 진짜 세상으로 이끄는 초대장이었다. ‘어서 와~ 이런 이웃은 처음이지? 운이 좋으면, 어쩌다 옆집에 살게 된 완벽한 타인과도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어.’ 하며 살랑살랑 손짓하는 그런 초대장 말이다.
#세종의힘 #헤이세종 #또바기 #핵노잼도시 #유잼도시 #이웃과친구되기 #함께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