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사용설명서: 행정수도? 빵지순례의 허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별로다. 겉으로는 반갑게 웃으면서 속으로는 사사건건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 감정에까지 손익계산서를 갖다 붙이는 사람. 말은 번드르르한데 진심은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 옆에 있으면 왠지 어색하고 불편하다. 물론 검은 속내를 대놓고 드러내는 것보다는 그럴듯하게 포장하려 애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과시용 위선일지라도, 매일 연습하다 보면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겉과 속이 반대로 뒤집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보드라운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못해 괜히 차가운 척하는 ‘겉바속촉(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상태)’ 같은 사람은 오히려 흥미롭다. 단단한 겉껍질을 조금만 열어보면 따뜻한 진심이 보인다. 이런 반전이야말로 진짜 매력이다.
도시도 그렇다. 떠들썩한 유명세에 홀려 찾아갔는데 막상 마주한 도시의 속살이 영 딴판일 때가 있다. 파리가 그랬다. 에펠탑, 몽마르트르 언덕, 사크레쾨르 성당, 쁘랭땅 백화점, 루브르 박물관, 퐁네프 다리, 센 강. 모든 것은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그러나 어떤 멋진 광경을 봐도 강렬했던 첫인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려 처음 맞닥뜨린 파리는 뜻밖에도 우중충했다. 새벽의 역사는 칙칙했고, 여름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새벽이어서 그래. 아직 어두워서 그래.’ 나는 나 자신을 다독이며 파리에 대한 기대를 붙잡으려고 애썼다.
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나는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게 예술의 도시 파리의 공기란 말이지~’ 하며 가슴을 한껏 부풀렸다. 희뿌연 새벽안개 사이로 달콤한 프랑스 향수 냄새가 배어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정작 내 콧속을 파고든 건 짙은 지린내였다. 아무리 독한 세정제로 박박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오래 묵은 지린내. 기대에 부풀어 파리로 떠났다가 당황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닌 모양이다. 예상과는 다른 파리의 모습에 극심한 충격을 받는 현상을 일컫는 ‘파리 증후군(Paris Syndrome)’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으니 말이다.
파리와는 정반대로 ‘츤데레(겉으로는 쌀쌀맞지만 실제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을 일컫는 일본어)’ 같은 반전 매력을 뽐내는 도시도 있다. 세계 최고까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최고의 반전 도시는 누가 뭐래도 세종이다. 반전의 재미를 결정하는 건 기대치다. 한마디로, 기대감이 낮을수록 그 매력이 커진다. 그런 면에서 세종은 상당히 유리하다. 세종의 대표적인 수식어는 ‘핵노잼(극단적으로 재미없는)’이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한국의 대표 ‘노잼(재미없는)’ 도시 대전을 능가할 정도로, 그 어떤 재미도 없는 도시라는 뜻이다. ‘맞다, 맞아!’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세종의 진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다.
세종은 누가 뭐래도 명실상부한 빵지순례의 허브다. 마음만 먹으면 전국의 유명 빵집으로 단숨에 달려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세종이다. 동남쪽으로 30분만 내려가면 성심당의 도시 대전이 나온다. 성심당은 이제 ‘대전의 빵집’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국구 빵집’이다. 어느 도시에서든 기차역에 가면 성심당 종이 가방을 든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만큼 성심당 빵을 맛보기 위해 대전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얼마 전, 대전으로 출장을 다녀온 남편이 묵직한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보는 성심당 가방이었다. 달큰한 냄새가 솔솔 흘러나왔지만 오븐에서 갓 나온 따끈한 빵 특유의 매혹적인 향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종이 가방에 담긴 튀김 소보로와 부추빵, 보문산 메아리가 기차와 지하철에서 포근한 빵 냄새를 조금씩 흘리며 집에 오는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웃음이 났다.
나는 당장 튀김 소보로부터 집어 들었다. 뻔히 아는 맛이지만 그래도 성심당 하면 튀김 소보로다! 바삭한 겉껍질 안에 소복하게 들어앉은 달콤한 팥소. 맛의 밸런스만 생각하면, 찹쌀 도넛이나 팥빵과도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튀김 소보로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특유의 식감이다. 시간이 흘러도 특유의 바삭함이 사라지지 않는 게 인기 비결이다. 팥소 때문에 눅눅해질 법도 한데 튀김 소보로는 언제 먹어도 바삭하다.
아무래도 성심당은 이런 곳이다. ‘성심당’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순간 뭐라도 할 말이 생겨버린다. 다시 시동을 걸고 빵지순례길에 올라보자. 대전에서 이름난 빵집이 성심당뿐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세계 제빵 월드컵에서 우승컵을 거머쥔 하레하레와 슬로우브레드도 빼먹을 수 없는 빵의 성지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종에서 동북쪽으로 30분쯤 올라가면 청주가 나온다. 그곳에는 충청권을 대표하는 초코케이크 맛집 우리마트 베이커리가 있다. 원래는 우리마트라는 동네 슈퍼 안에 있는 작은 제과점이었다. 그러나 폭신한 초코 시트와 생크림의 조화가 기가 막힐 정도로 환상적인 초코케이크가 입소문을 타면서 이제 멀리서도 찾아오는 전국구 맛집이 되어버렸다. 그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 서울 한복판에 있는 백화점에 팝업 매장을 열어도 연일 매진될 정도다.
서쪽도 만만치 않다. 서북쪽 천안에는 빵을 컨셉으로 하나의 마을을 조성한 뚜쥬르가 있다. 전국적인 프랜차이즈 빵집과 이름이 비슷하지만 생긴 건 오히려 뚜쥬르가 먼저다. 직접 밀밭을 경작할 정도로 빵에 진심을 쏟는 이곳은 어쩌면 호두과자보다 더 천안을 천안답게 만드는 명물일 거다. 세종에서 딱 20분 거리인 공주로 가면 지역 특산물 알밤이 들어간 파이를 만들어 전국 빵순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베이커리 밤마을이 있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풍년제과의 도시 전주와 이성당의 도시 군산이 나온다. 세종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 1시간 거리 안에 전국구 빵 명소들이 빽빽하다. 이쯤 되면 세종은 단순한 행정수도가 아니라 빵계(界)의 허브다.
‘에계, 다 주변 도시 이야기뿐이잖아! 세종에는 그럼 어떤 빵집이 있는데?’라며 껄껄 웃고 있는가? ‘역시 세종은 핵노잼 도시야!’라는 확신이 드는가? 아니다. 세종도 만만치 않다. 세종은 그야말로 곳곳이 빵세권(맛있는 빵집이 가까운 주거 권역)이다. 블루리본을 다섯 개나 받은 이한빵집, 아시아 제과월드컵 은메달을 수상한 한솔동 팡쇼 제과점, 고즈넉한 한옥을 따뜻한 빵 냄새로 가득 채우는 만나밀, 매일 아침 오픈런 행렬이 이어지는 몰튼버터. 그 외에 각양각색의 베이커리 카페까지. 지도만 펼쳐도 세종은 온통 빵 냄새로 가득하다.
어떤가? 요즘 사람들은 특색 있는 빵 하나를 맛보기 위해서도 기꺼이 여행을 떠난다. 그렇다면 빵순이들의 순례길 한가운데 있는 세종은 더 이상 ‘핵노잼 도시’일 수 없다. 건강한 천연 효모와 고소하고 진한 버터 냄새가 사방에서 당신을 유혹하는 도시. 밋밋한 행정수도가 아니라 갓 구운 빵냄새가 진동하는 빵의 허브. 그곳이 바로 세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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