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6] 봄날, 벚꽃이 내렸다

첫사랑

by 김현정

봄날, 벚꽃이 내렸다. 가볍게 부는 봄바람을 따라 벚꽃잎이 눈송이처럼 일렁이며 날아다녔다. 오랫동안 잠들었던 녹슨 철로 위로 소복이 쌓이는 벚꽃잎. 밤새 떨어진 빗방울이 곳곳에 남아 있는 산책로 위에 겹겹이 쌓인 옅은 분홍빛 꽃잎이 겨울 눈처럼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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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는 경성과 신의주를 잇는 기찻길이었던 그 길 위에서, 늘 스마트폰만 보던 사람들이 모처럼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아름답게 흩날리는 벚꽃에 정신이 팔린 채 느긋하게 산책로를 거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그 철로 위로 기차가 오가던 시절은 어땠을지 상상했다. 일제 치하에 건설돼 한국전쟁이 끝난 후 상당 구간이 운행 중단된 경의선 철도. 그 철로를 가만히 바라보니 그 시절을 고스란히 목격한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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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쭉 할머니였고, 그냥 늘 반갑게 웃어주는 게 좋았다. 할머니한테도 엄격하거나 고집스러운 성격 같은 게 있었겠지만, 적어도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늘 다정했다. 할머니는 엄마가 고급 일식집에서 사드린 동그랗게 말린 회나 내가 명절에 선물한 설화수 같은 것들을 동네 친구들한테 두고두고 자랑했다. 할머니가 기력이 없어 나들이를 못 하게 된 후에도 나는 할머니를 위한 명절 선물로 계속 설화수를 골랐다. 딱히 화장품 같은 걸 챙겨 바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화장대 위에 놓인 설화수를 보며 할머니가 늘 기뻐해서였다.


할머니는 아마 그 기차를 타 본 적이 없을 거다. 1930년에 태어나 신의주는커녕 경성에도 못 가 본 채, 할머니는 양산에서 시골 소녀로 자랐다. 할머니는 기차를 타 보기도 전에 시집을 갔다. ‘일본군이 처녀들을 마구잡이로 끌고 가서 위안소로 보낸다’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벌이고 있었던 일본은 패색이 짙어질수록 더욱 폭력적으로 위안부를 동원했다. 일본의 위안부 피해자로, 그 사실을 국제사회에 증언한 고(故) 김복동 할머니 역시 양산 출신이다. 그러니, 양산 일대의 소녀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그 풍문이 헛소문은 아니었던 거다.


할머니의 첫사랑 이야기에 대해서는 더더군다나 아는 게 없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시집간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사랑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도 늘 다정했다. 시골 마을에서 흔히 보기 힘든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할아버지는 늘 양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다녔다. 명절이든 휴일이든 늘 포마드를 머리에 곱게 바르고 반갑게 웃어 주던 할아버지는 내가 아는 누군가의 할아버지 중 가장 멋있는 할아버지였다.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시집가는 쪽을 택했던 할머니의 선택은 옳았다. 시집간 지 얼마 후에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할머니. 그때 할머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숨어서 조금만 기다릴걸. 아~ 내 청춘이여!’하며 한탄했을까, ‘그래도 그 덕에 이리 잘생긴 신랑을 만났으니 이만하면 됐지, 뭐~!’하고 웃었을까, ‘신랑이 잘생기면 뭐 해, 시집살이가 이토록 매운데.’ 하며 슬퍼했을까.


조금만 기다렸더라면 전쟁이 끝났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또 알 수 없는 것인데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니 나는 할머니의 선택이 현명했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좀 살 만해졌을 무렵, 전쟁이 터졌다. 우리가 다 아는 바로 그 한국전쟁 말이다. 젊디젊은 새신랑은 그렇게 징집돼 전쟁터로 떠났다.


할아버지는 대열을 정비 중인 부대원들을 뒤로하고 식량을 가지러 보급소로 떠났다. 식량을 챙겨 돌아간 벌판에는 할아버지를 반기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떠난 직후 북한군과 교전이 벌어져 모두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엄마가 태어났으니, 그날 할아버지가 취사를 담당하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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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이 되기도 전에 시집을 가 일본군에 끌려가는 화를 면할 수 있었던 할머니와 간발의 차로 살아남은 할아버지. 나는 두 분에게 벌어진 우연과 인연 덕에 지금 이곳에 있다. 오래된 철로 위에서 국립호국원에 묻혀 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떠올리니, 내리는 벚꽃잎과 함께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가 쌓이는 것만 같았다.


서로에게 첫사랑이었을 두 분의 인연에, 가곡 <첫사랑>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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