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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Mar 12. 2016

신의 패배

바둑의 신, 그의 2연패

바둑 좋아하는 남편과 살지만 나는 바둑을 잘 모른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삼촌이 검은 돌과 흰 돌을 나눠 들고 검은 줄이 가로 세로로 정확하게 그려진 나무판이 동그랗고 자그만 돌로 가득 메워질 때까지 한 집을 땄네 두 집을 잃었네 하며 바둑을 두는 모습을 종종 보긴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둑을 보면서도, 웬만한 남자들이 좋아 죽는다는 스타크래프트는 끊으면서도 인터넷 바둑 게임만은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틈만 나면 핸드폰으로 바둑을 두는 남편과 살면서도 내가 아는 바둑의 규칙은 집을 많이 만드는 사람이 이긴다는 것뿐이었다.


지금 나 같은 바둑 문외한의 눈길까지 사로잡는 세기의 바둑 대결이 열리고 있다.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와 세계 최고의 바둑 기사 이세돌 9단의 대결이 바로 그것이다.


오후 1시부터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대국을 시청하는 남편 옆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느 때 같으면 바둑 채널을 틀어놓는 남편에게 같이 즐길 수 있을 만한 걸 보자며 한 소리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인공지능을 상대로 인간이 승리하는 최후의 바둑이 될지도 모르는 게임인 만큼 나도 바둑의 결과가 꽤 궁금했다.


프로 바둑기사와 전문 진행자, 바둑에 나름 조예가 있는 패널들이 나와 바둑판 모형을 세워놓고 바둑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판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지금 알파고는 악수를 뒀다, 지금은 이세돌 9단이 7:3으로 유리하다며 해설을 이어갔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은 그야말로 바둑의 '바'자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까지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당길 만큼 흥미진진했다. 이세돌 9단과 마주 앉아 알파고가 시키는 대로 바둑알을 내려놓는 구글의 직원은 어떤 기분일지, 알파고가 시키는 대로 바둑알을 놓다가 구글 직원이 실수를 하면 이세돌의 상대는 알파고인 만큼 단순한 실수로 인정하고 돌을 옮길 수 있게 해 주는 건지,  일단 한 번 내려놓은 돌을 옮기는 것은 바둑의 기본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니 수정이 불가한 건지 궁금해하며 지루해야 마땅할 것 같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은 경기를 잠자코 지켜봤다.


알파고와의 대결이 알려진 후 인터뷰를 할 때마다 늘 자신만만하게 5대 0으로 이길 것이라던 이세돌이었기에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해설자의 설명을 듣고도 '설마'  했다. 결국 이세돌이 돌을 던지고 불계패를 선언했을 때도 '그래, 첫날이니까. 상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니까 제아무리 이세돌이라도 질 수도 있지' 했다.


하지만 2국에서까지 이세돌의 불계패가 이어지자 단순히 실망했다거나 아깝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들끓었다. 단순히 프로 바둑 기사가 바둑 프로그램과의 대결에서 진 것이 아니라 전 인류가 인공지능 앞에 무릎을 꿇은 기분이었다. 남편은 자신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인 이세돌 9단이 일개 바둑 프로그램에게 졌다는 사실이 너무도 충격적이라며 마치 자신이 대국에서 패하기라도 한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인류를 대표하는 이세돌의 2연패 소식이 알려진 후 몇몇 언론에서 이번 대국 자체가 불공정한 근거를 이리저리 쏟아냈다. 하지만 대국의 조건이 알파고에게 유리했건 아니었건, 인터넷에 연결돼 있는 알파고가 결국 다른 컴퓨터의 훈수를 받은 셈이건 그렇지 않건 결국 한 분야, 그것도 이 세상의 원자 수보다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에 기계는 결코 인간의 창의성을 따라오지 못할 거라며 자신했던 바둑이라는 분야에서 지난 10년 간의 기록을 종합했을 때 세계 1위라는 데 누구도 이견을 내놓을 수 없는 명실상부한 바둑의 신이 컴퓨터에게 연거푸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 대해 '누가 이기든 인간의 승리'라고 이야기했다. 맞는 말이다. 비록 최종적으로 알파고의 승리로 끝난다 하더라도 알파고의 승리는 곧 알파고를 개발한 딥마인드 개발자들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은 인류가 승리한 것이라는 모호하고 불분명한 말로 포장하기에는 알파고의 위세가 두렵다. 알파고는 프로 바둑기사라면 절대 두지 않을 악수를 택하고 어처구니없는 판을 짜면서도 상대의 비웃음을 사기보다 상대를 위축시키고 긴장시켰다. 알파고의 활약을 지켜본 딥마인드 개발자들조차 알파고가 이렇게까지 잘 할 줄 몰랐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개발자들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내는 존재. 실수처럼 보이는 자리에 돌을 내려놓고도 상대의 마음을 뒤흔드는 존재, 상대가 어떤 수를 택하건 흔들림 없이 그저 승률 70%의 자리를 찾아내 기어이 이기고 마는 존재. 그 존재가 왠지 두렵게 느껴진다.


인간의 전유물인 줄로만 알았던 창의력을 인간보다 더욱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며 많은 바둑인들로부터 신으로 추앙받는 한 인간을 무참히 짓밟는 인공지능의 위력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몇 달 전에 본 영화 <Her>이 떠올랐다. 인간의 감성을 그대로 모방하고 인간의 감정을 웬만한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으로 표현하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남자. 자신은 인공지능에게 순정을 바치지만 인공지능은 동시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인공지능을 버리지 못하는 남자. 결국 인공지능에게 버림받고 슬프게 우는 남자. 문득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아있는 세 번의 대국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사실 궁금하기보다 두렵다. 여러 전문가들의 말처럼 애당초 이세돌이 질 수밖에 없는 대결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겨주길 바란다. 언젠가 인간이 감히 인공지능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날이 찾아왔음을 증명해 보이는 사람이 이세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는 내 남편의 신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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