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살이

꽃보다 여행

달랑 비행기표 한 장 손에 들고 떠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by 김현정

지난 주말, 약속이 있어 오랜만에 가족 모두 서울로 향했다. 세종으로 이사하기 전에 살았던 동네에 들러 한 때 자주 먹었던 팬케이크도 먹고 첫째랑 자주 갔었던 동네 놀이터에도 두어 곳 들렀다. 시작부터 뭔가 설레는 마음이 드는 게 기분 좋은 여행이 되리란 예감이 들긴 했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일박을 하고 그대로 집으로 내려왔더라면 벌다를 것 없는 평범한 또 하나의 서울 나들이로 끝이 났겠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요즘 내 마음을 가장 설레게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딱딱하지만 묘하게 끌리는 군대식 말투로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태양의 후예도 아니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탄탄하고 짜임새 있는 스토리로 시청자들로부터 한국 드라마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제대로 된 드라마라는 호평을 끌어내는 시그널도 아니다. 내 마음대로 뽑은 최고의 프로그램은 뭐니 뭐니 해도 꽃보다 청춘이다. 할배에서 시작해 누나를 거쳐 청춘에까지 이른 꽃보다 시리즈. 혹자는 늘 비슷한 스타일이 지겹다고도 하고, 시청자들의 수준을 얼마나 얕잡아 보면 매번 억지 감동을 쥐어짜고 한심하고 뻔한 자막을 끌어대느냐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예정에 없이 비행기표 한 장 달랑 손에 쥐고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청춘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가슴이 뛰었다.


청춘이라기에는 약간 멋쩍고 청춘이 지났다고 하기에는 섭섭한 세 아저씨들의 페루 여행에서부터 꽃청춘을 보기 전에는 누군지 몰랐던 세 청춘들의 라오스 여행, 유명세에 비해 한없이 순수하게 느껴지는 네 남자의 아이슬란드 여행,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응답 시리즈에 출연했다는 네 총각들의 아프리카 여행까지 뭐 하나 빠뜨린 것 없이 모든 에피소드를 꼬박꼬박 챙겨보았다. 두 아이를 키우느라 직접 떠나기는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만은 가득하기에 배낭조차 주어지지 않는 진짜 청춘들의 여행을 보며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아닌 타인의 여행이긴 했지만 세 아저씨들이 마추픽추에서 일출을 기다릴 때는 나도 모르게 함께 기도를 했고 아이슬란드를 찾은 네 남자가 두 해 전 전 세계에서 엘사 돌풍을 일으킨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얼음동굴을 보며 감탄하고 하늘을 가득 메운 오로라를 보며 탄성을 지를 때 나도 함께 대자연의 신비함에 매료됐다.


멋진 풍광과 이국적인 문화를 제대로 알려주기는 하지만 조금은 밋밋한 다큐멘터리와 웃음에 주목하느라 멋진 경치와 진짜 여행이 주는 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예능의 장점을 절묘하게 더해 시청자들에게 직접 여행을 하는 듯한 설렘과 기쁨을 주는 꽃청춘 덕에 전 세계를 누비고픈 갈증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사실 제아무리 유명한 셰프가 값비싼 재료들로 화려하게 만들어냈다 하더라도 텔레비전 화면 속에 있는 음식은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비록 근사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내 배를 채우려면 남이 먹는 모습만 쳐다보는 데서 그치지 말고 직접 요리도 하고 숟가락질도 해야 한다. 우리의 여행도 그랬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들처럼 비행기를 탄 것도 아니었고,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곳을 찾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 넷이 보기만 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직접 부딪히고 경험을 했다.


팬티 한 장 준비하지 못한 채 갑작스레 납치되다시피 떠나는 바람에 짐이라곤 몸에 걸친 옷가지가 전부인 꽃청춘 출연진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우리가 갖고 간 짐도 꽤 단출했다. 1박 2일의 주말여행을 위해 준비한 작은 여행 가방 하나에는 네 식구의 속옷과 잠옷, 아이들의 여벌 옷이 한 벌씩 들어있을 뿐이었다. 정해진 일정이 없으니 집에 들러 하루를 자고 다음 날 여행을 떠나도 상관이 없었고, 굳이 잠을 자지 않더라도 잠깐이나마 집에 들러 필요한 옷과 물건을 챙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리 계획하지 않고 떠나는 정처 없는 여행이 주는 두근거림이 커서였는지 우리는 곧장 서해로 내달렸다.


우리가 정한 목적지는 무창포였다. 작년 봄, 세종에서 가까운 바다를 찾다가 우연히 들른 무창포의 포근한 공기와 매혹적인 바다 내음, 그 해변의 끝에 서서 멀리 서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던 꽤 근사해 보이는 리조트를 떠올리곤 즉흥적으로 리조트에 전화를 걸었다. 무창포는 물때를 맞춰서 가면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져 저 멀리 바위섬까지 걸어갈 수 있는 신비의 바다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고 매년 찬바람이 가시고 봄이 찾아오면 서해에서 이런저런 축제가 열린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말을 즐긴 후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비 내리는 일요일 오후여서 그랬는지 리조트에서는 여유 객실이 충분하다며 흔쾌히 예상보다 싼 값에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을 내주었다.


고작 하루치 속옷과 잠옷, 칫솔, 기본적인 화장품 정도만 들어 있는 가방에 수영복 같은 게 들어 있을 리는 없었지만 객실을 배정받고 12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는 수영장 안내문은 우리를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객실에 가방을 내려놓고 다급하게 수영장에 전화를 걸어 마침 수영복 렌털 샵 주인이 문을 닫기 직전이라는 고급 정보를 입수했다. 5분 내로 내려갈 테니 잠깐만 기다려 달라는 목소리가 꽤나 안타깝게 들렸는지 따로 챙길 옷도 없이 서울에서 내려온 정장 차림 그대로 렌털 샵에 달려갔더니 가게 주인이 사뭇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영복 네 벌을 빌리고 수영모 네 개를 구입해 어영부영 사우나에 비치된 비누로 샤워를 마치고 수영장에 입장하니 아직 폐장 시간이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손님이 거의 없었다.


서너 명 정도가 조용히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한적한 수영장에서 마치 수영장을 전세 낸 것처럼 어떤 방해도 없이 실내와 실외를 오가며 신나게 물놀이를 하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봤다. 유리창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서해 바다 위로 그 날의 태양이 붉게 내려앉고 있었고 여행객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바닷물이 빠져나간 모래사장 위를 걷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갑작스러운 여행은 며칠이나 더 이어졌다.


그동안 늘 시간에 쫓기며 마감 날짜에 허덕였던 아내와 바쁘디 바쁜 직장에서 공정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애썼던 남편은 두 사람이 쌓아 올린 가정이라는 성을 견고하게 지켜내기 위해 아등바등 시간을 쪼개고 이리저리 시간의 조각들을 빈틈없이 끼워 맞추느라 마음 놓고 여유를 즐기지 못했다. 하지만 좀 더 건강한 삶을 위해 둘이 함께 잠시 동안 일을 내려놓기로 마음을 먹고 바쁜 일상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니 굳이 철두철미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도 얼마든지 원하는 곳으로 핸들을 꺾을 수 있었다.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봐서 리조트에서 밥을 해 먹고, 리조트에 있는 세탁실에서 빨래를 돌린 다음 방으로 갖고 와 하나하나 널었다가 마른 빨래를 걷어서 개고, 커피를 마시고, 가까운 박물관에 들르는 별 것 아닌 여행이었다. 사실 굳이 여행이 아니어도 집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약간은 거창한 이름을 붙였기에 우리는 아직은 차가운 바다에 발도 담글 수 있었고, 집에서 한 시간 삼십 분 밖에 걸리지 않는 곳인데도 한 번 가봐야지 하면서 몇 년째 가 보지 못했던 어느 도시를 구경할 수 있었고, 바닷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삐죽 모습을 드러낸 갯바위 틈새에서 살고 있는 조그만 새우와 사람들의 눈에 들키지 않으려고 모래와 비슷한 색의 등딱지 밑에 숨어 질퍽질퍽한 갯벌 위를 살금살금 옆으로 기어가는 손톱보다 작은 게도 볼 수 있었고, 촌스러운 검은색 수영복을 빌려 입고 해가 지는 서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수영장에서 누구보다 신나게 깔깔 웃으며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