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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Feb 23. 2024

자책과 성찰이 만나는 곳

패스파인더

패스파인더(pathfinder)라는 단어가 있다. '길'을 뜻하는 'path'와 '찾아내는 사람,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finder'가 더해져서 탄생한 복합명사 'pathfinder'의 뜻은 상상하는 그대로다. 새로운 길을 인도해 주는 길잡이나 어떤 분야를 새롭게 개척한 선구자, 새로운 도로를 개척하는 사람 등이 모두 패스파인더에 해당한다. 그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찾는다는 의미가 있는 단어이기에 1996년에 미국 플로리다에서 발사된 후 7개월 동안 1억 2천만 마일을 날아 1997년에 화성에 도착한 무인 화성 탐사선에도 패스파인더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책이라는 감정이 훅하고 가슴을 파고들 때가 있다. 자책이란 대개 무언가 일이 잘못된 후에 과거의 잘못된 선택이나 행동을 후회하는 형태로 찾아온다. 후회가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만 있다면 이미 지나버린 시간에 대해 무언가를 후회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자책이 뒤따를 정도로 심각하거나 큰일이 벌어졌다면 과거의 자신을 비난하거나 책망하는 것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심지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벌어진 후에 자신을 책망하느라 몇 날 며칠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고서야 비로소 자신에게는 그 어떤 잘못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자책 자체가 그다지 권장할 만한 감정은 아니지만 자책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그 순간을 디딤판 삼아 눈앞의 문제를 뛰어넘는다면 뉘우침과 후회가 좀 더 건강한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책이 이렇듯 바람직한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자책의 감정이 깊어져 자기 연민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자신을 향했던 자책이라는 총구가 어느 순간 타인을 겨눠 다른 누군가를 향한 원망으로 바뀔 수도 있다.


종교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떨쳐내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 현각 스님은  <산티아고, 나에게로 가는 길>이라는 책에서 '딱 한 번뿐인 인생을 자책이나 원망으로 물들여서도 안 되며, 자기 연민에 빠져서도 안 된다'며 '자기 연민은 인생의 병살타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사람은 더 이상 돌이킬 방법이 없는 과거에 빠져서 허우적댈 뿐 그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 올릴 방법을 찾지 못한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으려는 노력 없이 자꾸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는 자기 연민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책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자아성찰은 다르다.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한다는 점에서 자책과 닮은 점이 있지만 스스로를 비난하고 책망하기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는 점에서 자아성찰은 자책과는 전혀 다른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고다.


나는 자책했다. 뒤를 돌아보니 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행동들이 수없이 많았고 다르게 내렸더라면 좋았을 결정들이 수두룩했다. 내가 만약 조금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만약 다른 결정을 내렸더라면, 녀석의 삶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후회가 나를 옥죄었다.


자책을 멈추고 과거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자아성찰로 이어지는 그 길목을 찾고 싶었지만 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지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매캐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정설차가 다져 놓은 슬로프를 벗어나니 이틀째 내린 폭설로 제설차의 분주한 움직임이 무색하게 여전히 눈으로 뒤덮인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스키 위에 올라선 채 그 길을 따라 내달리며 생각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지도가 없다면 직접 그 길을 만들어내는 패스파인더가 돼도 괜찮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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