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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Feb 10. 2024

스키를 타며 생각하는 것들

세상에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있다. 너무 난해해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있고, 어렵지도 않고 정답도 알지만 굳이 그 답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그런 질문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답하기 어려운 것은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데 딱 하나만 답을 고르라고 강요하는 그런 질문이다.


그런 질문 중 하나가 "어떤 계절이 제일 좋아요?"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모든 계절에는 저마다 좋은 이유가 있다.


봄은 봄이라서 좋다. 모든 생명이 새롭게 되살아나고 움츠렸던 세상이 푸르고 아름다운 빛을 내뿜는 봄. 봄이 되면 곳곳을 다양한 색으로 물들이는 꽃도 구경하고 따뜻한 햇살에 어울리는 살랑살랑한 봄옷을 꺼내 입고 어디로든 나들이라도 갈 수 있을 것 같고 왠지 설레는 마음을 타고 하늘로 두둥실 날아갈 듯 마음이 들뜬다.


여름도 좋다. 연둣빛이었던 세상이 쨍한 초록빛으로 바뀌고 뜨거운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여름이 되면 일단 바다로 달려가 바닷물에 발이라도 담글 수 있을 것 같고, 온몸을 뒤덮고 있는 두툼한 지방 같은 건 슬쩍 모른 체하며 더위를 조금이라도 덜어줄 짧은 바지와 소매 없는 셔츠를 입고 신나는 바캉스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커진다.


가을도 다르지 않다. 도시를 뜨겁게 달궜던 열기가 사라지고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면 하늘이 더 높다. 가을 하늘이 높은 것은 감상이 아니라 과학이다. 가을이 되면 태양의 고도가 낮아져 대지가 덜 가열되고 결과적으로 대기 중으로 상승하는 먼지나 수증기가 줄어들어 하늘이 더 깨끗하고 높아 보일 뿐 아니라 파란빛의 산란이 줄어들어 더 파랗게 보인다. 그러니 가을 하늘이 유달리 높아서 가을 하늘을 사랑하는 나의 취향 역시 감상이 아니라 과학일지도 모른다.


봄, 여름, 가을이 다 좋은데 겨울이라고 딱히 좋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실, 겨울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기다려지는 계절이다. 우중충한 도시를 뒤덮는 하얀 눈, 안개가 낀 듯 희뿌연 머릿속을 말끔하게 씻어주는 차가운 공기. 겨울을 더욱 빛나게 하는 크리스마스.


그리고 스키.


스키를 타다 보면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들이 있다. 수만 조각으로 나뉘어 사방으로 흩어지곤 하는 생각의 갈래들이 슬로프 위에 올라서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복잡했던 마음도, 골치 아픈 일상도 리프트에서 내려 슬로프 앞에 서는 순간 모두 사라진다. 경사가 급할수록 마음은 더욱 단순해진다. 경사가 끝나고 평지가 나오는 그곳까지 안전하게 내려갈 방법은 집중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찰나의 고민은 있다. 급한 경사 위에 올라서면 마치 그곳을 내려가려는 마음 같은 건 먹은 적이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후진해서 옆길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내려가기로 마음먹고 나면 마지막 순간까지 지나치게 무리하다 부상당하는 일 없이, 눈무더기에 스키가 걸려서 날아가는 일 없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치는 일 없이, 조심성 없이 본능대로 즐기는 스키어나 보드와 충돌하는 일 없이 안전하게 내려가려면 그저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명상을 하듯 무아지경에 빠져 슬로프를 타고 내려가다 만 갈래로 나뉘어 흩어졌던 몇 개의 상념이 다시 내게로 되돌아오는 순간이 있다. 쉽게 내려가기 어려운 급경사를 타고 내려가다가 휘청하면서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기도 하고 넘어질 걸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다가 눈무더기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 조각난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다시 날아와 박히는 것이다. 무아지경의 상태가 깨진 순간 나를 찾아온 생각들이 불필요한 잡념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런 순간에 떠오른 생각들은 순도 높은 진리에 가깝게 느껴진다.

나는 할 수 있다.

상급 슬로프에 올라서면 나도 모르게 되뇌게 된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를 믿자." 리듬이 깨지고 턴이 흐트러지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몸이 휘청이는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내려가도록 나를 다독이는 만트라. 이런 주문을 외는 데는 그 어떤 메커니즘도 작용하지 않는다. 경사진 슬로프가 시작되는 지점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순간의 쪽팔림을 참고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스키를 신고 경사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좀 힘들긴 하지만 그 순간만 참으면 덜 경사진 길로 얼마든지 내려갈 수가 있다. 하지만 일단 경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하면 끝까지 내려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 올라서면 조명이 꺼질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버틸 수밖에 없듯이 슬로프 위에서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내려가려면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는 마음을 번쩍 후려쳐 날려버리고 맹목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 끝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믿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낼 수 있다는 믿음.


넘어지는 게 두렵다면 일단 넘어져 보자

넘어지는 게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인생에서든, 스키에서든. 살아가다가 고난과 마주하면 좌절스럽지만 또 굴하지 않고 버텨내면 어떻게든 그 시간은 흘러가고 언젠가는 훌훌 털고 일어나 별일 없었다는 듯 웃을 날이 온다. 스키를 탈 때도 그렇다. 타도타도 넘어지는 건 언제나 두렵다. 재미있게도 넘어진 기억이 가물가물해질수록 넘어지는 게 점점 더 두려워진다. 어쩌면 넘어진 지 너무 오래돼서 일어나는 방법을 잃어버린 탓에 넘어지는 게 두려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날 두 번째 넘어지건, 어제 넘어지고 오늘 또 넘어지건, 1년 만에 넘어지건, 결국 똑같다. 넘어지면 일어나면 된다.


가끔 넘어질까 봐 걱정돼서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게 될 때가 있다. 좀 더 제대로 타려면 당연히 연습해야 할 기술을, 넘어지는 게 두려워서 엉거주춤 포기하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뜻밖의 복병을 만나 툭하고 넘어져 보면 안다. 이번에도 역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넘어져보면 안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두려움 속으로, 그 중심부를 뚫고 들어가는 방법 밖에 없다는 걸.


시도해야만 볼 수 있는 게  있다

스키장에는 리프트를 타지 않고는 볼 수 없는 풍경이 있다. 용평리조트의 블루 리프트가 그중 하나다. 블루 리프트에 올라앉으면 그 리프트에 탑승하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도 통과할 수도, 볼 수도 없는 그런 통로가 나온다.  눈으로 뒤덮인 나무들이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통로는 날이 밝을 때도 아름답지만 어두운 밤 조명이 켜진 그 길은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황홀하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 조명이 켜진 블루 통로를 통과할 때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돼 신기한 세상으로 이어지는 마법의 통로를 지나는 기분이 든다. 스키를 타지 않았다면, 블루 리프트를 타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 세상에는 그런 게 있다. 해보지 않으면 결코 보지 못하는 것들. 시도해야만 보이는 그런 것들이 있다.



용평 리조트 블루 리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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