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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Mar 02. 2024

드미트리 시쉬킨

거침없이 내달리는 시간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여러 콩쿠르를 석권하며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드미트리 시쉬킨.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그의 연주회가 열렸다. 클래식 뉴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법한 이름인 임윤찬, 조성진 같은 천재적인 한국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직접 들으려면 손이 무척 빨라야 하고 운도 좋아야 한다. 클래식 애호가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나 같은 사람도 조성진이 치는 쇼팽의 폴로네이즈나 임윤찬이 치는 라흐마니노프 3번을 직접 들어보고 싶다는 원대한 희망을 품고 살 정도이니 이들의 연주를 직관하는 영광을 누리려면 수강신청을 위한 클릭 전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광클에 성공해야만 한다. 


시쉬킨 역시 '젊은 거장'이라는 찬사를 받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고 한국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공연을 매진시킨 적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공연 예매가 시작되기 전부터 로그인을 끝내고 광클을 시작할 채비를 마친 다음 초시계를 켜놓고 기다려도 티케팅에 성공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조성진이나 임윤찬과 달리 시쉬킨 공연에는 그 정도의 광적인 속도전은 없다. 


예술의 전당 음악당 내부에 설치된 전시물

티켓 판매가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난 후에 예매에 나섰지만 힘들지 않게 앞에서 네 번째 줄에 있는 좌석을 얻을 수 있었다. 무대 오른쪽 방향 네 번째 줄은 황홀했다. 피아노 앞에 앉은 그가 집중했을 때 어떻게 입술을 쭉 내미는지, 기다란 손가락이 건반 위를 내달릴 때 그의 눈썹이 어떻게 오르락내리락하는지 빠짐없이 보였다.


물론 네 번째 줄보다 첫 번째 줄이 좋은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얼마 전 운이 좋게도 첫 번째 줄에 앉아 감상했던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연주는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어차피 조명이 켜진 무대 위에서 어두컴컴한 객석이 제대로 보일 리 없고 짐머만은 나를 본 것이 아니라 그저 객석의 어느 한 곳을 바라본 것뿐이지만 수십 년 동안 피아노를 쳐온 대가답게 여유롭게 객석을 바라보는 그와 나의 눈길이 교차하는 순간, 오로지 나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해 노장의 대가가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하는 것 같은 황홀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무대를 둘러싼 사방의 객석을 가득 메운 수많은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홀로 무대 위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시쉬킨의 표정은 사뭇 긴장돼 보였다. 차분하게 시작된 그의 연주는 아름다웠지만 그의 눈빛은 한동안 미세하게 떨렸다. 눈썹과 입술의 움직임, 볼의 씰룩임까지도 공연의 일부분으로 승화시키며 쇼팽 녹턴 같은 건 눈 감고도 칠 것 같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던 짐머만의 노련한 연주와 사뭇 대비되는 시작이었다. 


그랬던 시쉬킨이 차이코프스키 러시아풍의 스케르초를 거쳐 리스트 헝가리안 랩소디로 넘어가면서 피아노와 하나가 돼 자신 외에 그 누구도 감히 따라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천재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는 그의 손가락이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피아노 건반을 누볐고 연주를 마친 후 무대 위에서 인사를 하는 그의 표정에 만족감과 편안함이 더해졌다. 


인터미션이 끝난 후 시쉬킨은 다시 스크리아빈과 라흐마니노프를 지나 프로코피예프까지 들려주었고 결국 예정된 연주는 모두 끝났다. 하지만 관객들의 쏟아지는 박수에 시쉬킨은 몇 차례나 다시 무대에 올라 인사를 했고 무려 세 곡의 앙코르 연주를 들려주었다. 아름답지만 날카롭고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박수 소리에 끌려 무대로 다시 올라올 때마다 그의 표정은 점점 환해졌다. 


공연이 모두 끝난 후 음악당 로비에는 길고 긴 줄이 생겼다. 시쉬킨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부터 한참 떨어진 곳까지 이어진 줄 때문에 한 층 아래의 계단을 이중으로 빙 둘러싸는 기다란 인간띠가 생겨났다. 예술의 전당 직원들은 1천 명은 족히 넘을 관객들이 질서 정연하게 차례를 기다릴 수 있도록 줄을 세우며 '사인회는 40분 동안만 진행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연을 볼 때는 시쉬킨의 눈짓과 몸짓을 빠짐없이 마주할 수 있었던 앞자리가 너무도 좋았었는데 뒷자리에 앉은 관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야 간신히 공연장을 벗어나 한 층 아래 계단에서부터 사인받을 차례를 기다리려니 어차피 뒤에 앉아도 귀에 들리는 소리는 같을 텐데 뒷줄에 앉아 연주를 감상한 사람들이 현명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니 40분 내에 시쉬킨 앞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박수가 잦아들 때까지 귀찮은 기색도 없이 해맑게 웃는 얼굴로 무대 위로 다시 올라왔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설혹 40분이 넘더라도 사인 한 장 받겠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든 관객에게 기회를 줄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참을 기다려 시쉬킨 앞까지 간 사람들은 대개 공연장에 비치된 프로그램북을 내밀었고, 검은색 계열의 프로그램북을 받아 든 그는 은색빛 마커로 쓱쓱 사인을 했다. 의미 없는 반골 기질을 타고난 나는 남들 다 받는 프로그램북에 사인을 받는 게 왠지 내키지 않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케이스를 벗겨 안쪽에 사인을 해달라고 내밀었다. 그는 역시 섬세했다. 눈앞에 놓인 핸드폰 케이스를 보고 고개를 들어 나를 한 번 쳐다본 시쉬킨은 은색 마커를 내려놓고 검은색 마커를 손에 쥐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색 마커는 내 핸드폰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시쉬킨의 사인
시쉬킨이 핸드폰 케이스 안쪽에 남긴 사인


예술의 전당은 낮보다 더욱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 밤이 내려앉고 그 위에 색깔이 덧입혀진 예술의 전당에 새하얗고 기다란 그의 손가락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선율이 떠다니는 듯했다. 


밤이 내려앉은 예술의 전당


시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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