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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w Apr 18. 2023

두 번째 산티아고

Camino de Norte

2023.04.13


Biarritz - Irun

새벽 비행기를 타고 비아리츠 공항에 도착했다.

9시 10분쯤, 입국장에 도착하여 창 밖을 보니 비가 많이 내린다. 지난번 프랑스길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도 비가 많이 내렸다.

마치 그 마지막 날에서 오늘로 이어져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 이번에는 북쪽길이다.


오늘은 이룬의 북쪽길 시작점 알베르게에서 자고 내일 시작할 예정이다. 먼저 공항에서부터 이룬 알베르게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하고 10시쯤 출발했다.


출발하기 전, 비행기용 기내 가방에서 방수 가방을 꺼냈다. 아무래도 우산으론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빗길을 걷기 위해 갖고 있던 짐을 방수 가방으로 모두 옮기고 우비를 입고 우산꺼내 걸을 준비를 마치고 나니 10시가 다 되었다.

이룬까지는 약 30km. 내 걸음으로는 약 6시간 걸리는 거리이다. 오후 4시쯤에 도착할 것 같았다.


비아리츠에 오기 전 미리 구글 오프라인 지도로 이룬가는 길을 저장해 두었다.


프랑스길은 Bayonne에서 Saint Jean Pied de Port 이동하고, 북쪽길은 Biarritz에서 Irun으로 이동한다.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구글이 알려준 길은 차가 다니는 옆 샛길이었다. 차와 함께 걸으니 조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형광 연두색 우비를 입고 있어서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고 스스로 안심했다.


걸을수록 비가 계속 거세지고 많이 내리더니 바람까지 불어 걸을 때 안경 앞이 안 보이는 수준에 이르렀다. 공항에서 약 15km 걸으니 Saint Jean de Luz에 도착했다.


여기서 첫 번째 흔들림이 왔다.

비가 계속 오는데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고 갈까. 계속 걸을 걸을까. 중간에 버스를 타고 이룬까지 갈까.


외부요인으로 이렇게 온갖 생각이 들 땐, 일단 계속 걷는다가 내가 세운 산티아고 방침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일단 계속 걸으니 국도에서 산길로 이어지는 등산길이 나왔다.


도로로 나오니 설상가상으로 거센 바람 때문에 우산이 부러졌다. 버스 정류장이 나오기만을 계속 기도하며 걷다가 드디어 산 꼭대기에서 이룬까지 가는 3번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1시간 배차로 다니는 버스는 오지를 않고 부러진 우산과 나는 더욱 비참해진 모습으로 하염없이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차 한 대가 서더니 손 짓으로 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얼른 차를 탔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나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로 감사합니다는 계속 외쳤다.

그분들은 모로코에서 오신 분들로 프랑스에 거주 중인데, 너무 비바람이 세고 내가 너무 안타까워 보인 데다가 시간이 거의 저녁 5시가 다 되어 태워주셨다고 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어려웠지만, 그분들이 최선을 다해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당신들도 한국 음식, 한국 문화를 좋아하신다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이 비바람을 뚫고 어떻게 산을 내려갈지 걱정이 천근이었는데, 차를 타니 7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걸음’이 차에 비에 얼마나 하찮은가를 느끼는 순간이다.


동시에, 이렇게 기적 같은 일이 나에게 생기다니. 산티아고 책에서만 봤던 수호천사 같은 일이 나에게도 생기다니.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너무 신기하면서도 감사한 순간이었다. 차에서 내리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재빠르게 3개 국어로 외친 다음 다시 첫 번째 숙소이자 북쪽길의 크레덴시알을 만들 수 있는 이룬 알베르게까지 한 시간 정도를 걸었다.


다시 변수가 생겼다.

내가 미리 찾아놓은 목적지에 도착했는데도 알베르게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눈의 띄는 형광 연두색 우비를 입고 망가진 우산을 들고 있는 나에게 두 번째 수호천사가 스윽 다가오더니 매우 유창한 영어로 "혹시 순례자이신가요? 알베르게를 찾고 계신가요?" 하고 물어왔다.

나는 Yes, Yes를 외치고 너무 지쳐 멍하게 서 있었는데, 이 수호천사가 내가 들고 있는 구글 지도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알베르게가 여기로 이사했다고 알려주시고는 행운을 빈다는 말과 함께 가던 길을 가셨다.


그렇게 알려주신 곳으로 20분쯤 더 걸어갔는데 나는 워낙 길을 찾는 감각이 없기 때문에 그 쉬운 장소에서도 한 15분을 헤매다가 안 되겠다 생각하여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젊은 레이디에게 혹시 산티아고 하우스를 아는지 물어봤다.


그 젊은 레이디는 "Yes. 매우 가깝다. 저 아파트에서 쭉 내려가면 너의 오른쪽에 있다."라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추가로 10분을 더 헤맨끝에 드디어 알베르게를 찾아서 들어갔다.


이룬 알베르게는 크고, 쾌적했다.

크레덴시알을 만들고, 알베르게를 관리하시는 봉사자분의 안내를 받아 침대를 배정받자 이제 정말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는 실감이 났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와는 또 다른 시작의 느낌이다.


비에 몽땅 젖은 옷과 양말을 갈아입고 씻은 다음 주방으로 내려갔다. 새로 이사한 곳이라 그런지 주방 시설이 깨끗하고 쾌적했다.

비아리츠에서 내려오는 길에 큰 슈퍼마켓에 들려 두유와 견과류 한 봉을 다 먹었더니 배는 크게 고프지 않았다. 기운이 없어서 음식을 해 먹을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하고 너무 추웠기에 따뜻한 물을 끓여 마신 후 짐을 정리한 후 바로 잠이 들었다.

중간중간 너무 추워 잠이 깼던 것 같다.

침낭에서 움츠리기를 여러 번, 아침이 왔다.

 

작년 내가 산티아고를 간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왜?라고 물었었다.

산티아고를 ‘왜’ 가느냐.

산티아고를 간다고 했을 때 ‘와, 산티아고를 간다고? 가서 좋은 시간이길 바란다’가 아닌, 거길 ‘왜’ 가냐고 묻는다.

출발하기 전 이런 질문은 있을 법했다.


그런데 프랑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중 특히 한국인 몇몇 분들은 젊어 보이는 내가 여기 ‘왜’ 왔는지를 궁금해했다.


그중 어떤 분은 나에게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순례길 다 걷고 나면 뭐 할 거냐’는 질문을 했다. 아마 30대 초반이었으면 이러한 무신경한 말에 언짢거나 당황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깃털처럼 가벼운 입을 가진 상대에게 내가 걷기로 한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난 ‘그런 말을 듣기 싫어서 산티아고에 왔어요. 유퀴즈에도 나왔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그 다름에 뭐 할 거냐라는 질문을 제일 싫어한대요. 저는 그냥 걸으러 왔어요’하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분들에게 산티아고에 왜 왔냐는 질문은 아마도 ‘밥 먹었어?’처럼 큰 의미 없이 가볍게 묻는 것이 이라.


여러 번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 마치 구직 중에 면접을 보는 느낌 같단 생각이 들었었다.

내 생각을 그럴듯한 문장으로 잘 포장해서 짧은 시간 내에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깊은 인상을 주어야 하는 그런 답변을 생각해 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느 퇴근길에 ‘오늘 집에 가는 길에 고등어조림을 해 먹어야지’라는 생각이 그냥 떠오르는 것처럼  ‘왜’라는 질문에 받았을 때 반드시 답변을 준비해야 하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물론 이유를 만들자면 그럴듯하게 지어낼 수야 있겠지만, 산티아고에선 그럴 필요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산티아고 북쪽길, 약 830km를 온전히 다 걸은 다음 내가 ‘왜’ 걸었을지는 깨닫고 싶은 순례길이다.


지금은 이유 없이 천천히 걸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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