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내 인생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정형돈과 하하 사이의 어색함을 무마하는 노랫말이었다.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관계가 적절히 설명되었다. 설익은 관계성은 2006년 8월 19일 뉴질랜드 해변가에서 하하의 폭로로 표면화 되었다. 8개월 남짓을 함께하고도 어색한 관계를 고백할 수 있는 솔직함은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은 결단에서 비롯된 것이었겠지만, 감당하기엔 벅찼다. 2006년 9월 23일, 제작진이 식당 룸에서 둘만 남겨뒀을 때 둘은 안절부절 못했다.
하하는 두리번거리며 어딘가에 전화했고, 정형돈은 하하에게 건네는 말도 아니고 혼잣말도 아닌 말을 허공에 흘리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하하의 전화가 끝나도 둘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각자의 휴대전화를 만지며 알맹이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침묵의 폭탄 돌리기 게임을 시작했다. 폭탄이 터지지 않게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업했다. 단, 이 게임에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티내서는 안 되었고, 티가 나더라도 아는 척해서도 안 되었다. 두 사람은 공유점을 찾으려 했지만, 쾅, 끝내 어색함이 폭발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지만, 어정쩡하게 우호적인 사이에는 지옥이 있다. 익숙함과 마음의 거리는 정비례하지는 않는다. 무해함과 우정 사이에서, 익숙함인지 친밀함인지 모를 관계가 가지는 거리감은 서로를 강렬한 존재감으로 상호 구속한다. 어떻게든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증명할 의무를 지는 것이다. 증명에 실패한 순간의 어정쩡함의 민낯이 드러나 민망해진다. 이 골짜기를 지나야만 관계는 긴밀함은 우상향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쉽지 않다. 특히 나이들수록 이 골짜기를 넘는 게 힘겨워진다.
익숙함과 친밀함은 다르다. 익숙하지만 친밀하지 않은 가족 관계도 있고 친밀하지만 아직 어색한 연인 관계도 있다. 시간이 맞대지면 익숙해지고, 익숙함이 불편하지 않은 채로 지속되면 아주 익숙해진다. 잘 익은 익숙함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양 문제인 것이다. 시간을 들일수록 관계의 거리는 가까워지는 편이지만 한계가 있다. 익숙함이 그 자체가 친밀함으로 숙성되는 것은 아니다.
친밀함은 시간의 질 문제다. 관계 사이에 들어찬 ‘좋음’의 밀도가 친밀도를 결정한다. 시간과 무관하게 친밀감을 느낄 수도 있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관계의 거리는 멀지만 친밀감은 극대화 된 경우다. 관계를 정립한 후 시간의 톱니가 맞지 않으면 익숙해지지 않아 관계를 물리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익숙함과 친밀함은 상호 확증적이다. 두 영역 간 교집합의 너비가 특이점을 지나면 우정이 발생한다. 한 번 생성된 우정은 큰 다툼이 없는 한 비가역적이다. 시간은 기본적으로 익숙함의 편이어서 익숙함과 합성된 친밀감은 시간을 먹고 숙성된다. 내 경우, 1년 만에 만났을 때 어제 만났던 것처럼 안부 따위 묻지 않고 묵묵히 밥만 먹어도 자연스러울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애초에 친한 지인이었지 친구는 아니다. 물론 하하처럼 기어이 호들갑떠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의미는 다르지 않다. 아무리 소리가 나지 않아도 요동치는 강아지 꼬리와 마음의 파장은 같다.
정형돈과 하하의 관계는 익숙함의 문제인지 친밀도의 문제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당사자만 알 것이고 주변인 정도나 어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시청자로서는 익숙함 문제로 읽었다. 시간의 양은 결국 공유되는 것들의 양이다. 흘러가는 시간은 공유지에만 쌓여 양으로 체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그들은 [무한도전] 외의 공유지가 없어 보였다.
내 인간관계가 그랬다. 친하게 지내던 학생이 옛 선생이랍시고 찾아올 때면 반갑고 난감했다. 교실 안팎의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학생은 나를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고, 바른 사람으로 기억할지 모르나 교실 밖을 나오면 나는 고장났다. 교실 안에서는 내가 할 말이 많았다. 기출 문제에 대한 내 분석과 내가 만든 수업 자료를 소재로 수업이 진행되므로 수업은 나를 드러내는 행위였다. 나의 드러냄이 학생의 필요여서 우리는 궁합이 좋았다. 수업 후 목은 아팠지만 퇴근길에 충전되어 있는 마음의 힘은 하하의 ‘으샤으샤’였을 것이다.
교실 밖에서는 할 말이 없다. 수업 외적인 것의 관심사는 서태지, 스타크래프트, 무한도전 외 부스러기 몇 개였다. 올림픽, 월드컵도 내게 소음원이었고, 내가 1,000,000원을 지불할 경우 손흥민이 군대에 가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병역 공정성에 기여할 것이고, 피겨에 흥미가 없으므로 김연아도 관심 밖이었다. 대도시에서의 승용차는 ‘타노스’를 두 번 해야 할 대상이고, 음악은 듣지 않았고, 여행과 맛집은 귀찮았다. 사석에서 기후 위기를 위한 골프장 폐쇄 여부를 논의할 수 없으므로 나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내가 위장할 수 있는 사회성의 최소한이었지만, 사회성을 실천한 날이면 기가 빨렸다. 명절에 식구들과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아도 그 자체로 피곤해 하루는 혼자를 충전해야 했다.
앞서 예로 든 친밀하되 익숙해지지 못해 무른 관계가 내 연애사에 잦았다. 모든 연애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시작되었다. 선생과 학생의 관계처럼 동료로서 ‘업무’를 통해 익숙해졌고, 그 익숙함에서 친밀감이 시발됐지만, 관계가 전환된 이후, ‘업무가 아닌 나’와 ‘업무가 아닌 너’는 접점이 없어서 갑자기 낯설어졌다. 정형돈과 하하의 어색함도 그래 보였다. 그들은 [무한도전]을 통해 익숙함을 포개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인간관계에서는 굳이.
[무한도전]이 종영된 후, 멤버들이 타방송에서 만나는 것을 보면, 항상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었다. 정형돈과 하하의 어색함에서 [무한도전]의 멤버십으로 성장한 여정들이 압축되어 다가오며 울컥해진다. 그들이 공유한 거대한 인생사가 부럽다. 그들은 서로 맞든 맞지 않든, 익숙함이 친밀감의 멱살을 잡아끌어 올려 전우애 수준의 관계성을 구축했을 것이다. 실제로 타방송이나 유튜브에서 그들이 모였을 때 대화 소재가 [무한도전] 후일담인 경우가 많았고, 표정들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들의 얼굴 속에서 가사가 수정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나를’이다. 개별 멤버 누구라도, 심지어 대한민국이 친구라는 유재석조차도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무한도전]이 필요했고, [무한도전]을 설명하기 위해 멤버들이 필요해서 ‘너’는 이미 ‘나’였다. 내 안에 너 있고, 내 속에 네가 너무도 많은 우정의 연대, 삶이다. ‘좋아요’로 상징되는 얇은 관계들이 ‘너’의 의미를 훼손해 사람들은 관계의 피로를 호소하지만, 본래 인간은 나는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될 수 있는 서시를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수업이 없는 날, 나는 그 누구로도 설명되지 않았다. 나는 ‘나 스스로 나인자’를 코스프레 하는 방구석 신이었다. 보고 또 보는 [무한도전]의 익숙함에 도취되어 나와 친하다고 착각해 왔을 뿐이다. 이건 내가 원한 삶이 아니었고, 나는 행복하지 않다. 게임, 유튜브, 넷플릭스로 설명되는 나와 비슷한 급의 얼치기 신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삶과 친하지 않다. 최소한 방구석이 오답임은 명백하다. 삶은 결국 누구와 함께 하느냐로 그 이름과 맛이 결정된다, [무한도전]이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