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와주길 바라

시간 절도범들에게

by 하루오

2006년 전반기의 [무한도전]은 아직 [무한도전]이 아니었다. [1박2일]과 [런닝맨]이 [무한도전]의 아류이듯, [무한도전]도 [MC대격돌-공포의 쿵쿵따]와 [X맨]의 계보를 벗어나지 못했다. 시즌3로 넘어오며 포맷이 바뀌긴 했지만 유재석과 모자란 아이들의 좌충우돌 콘셉트가 강화된 형태일 뿐이었다.


2006년 6월 3일 시작된 월트컵 특집의 ‘물공 헤딩’을 신화, 앙리가 나왔을 때도 반복하는 것은 지겨웠다. 당시도 상대에게 물공을 맞추기 위해 반칙을 일삼는 것이 싫었고, 어차피 재밌는 그림을 위해 멤버들은 눈치껏 물공이 맞으려고 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처음 한 번은 몰라도 뻔한 그림을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우려내는 것은 내가 아는 [무한도전]이 아니었다. 다시 보기 할 때는 대체로 스킵했다.


‘예능의 역사는 [무한도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수사를 붙일 만한 [무한도전]은 2006년 7월 8일 10회 발리 특집에서 태동했다. 발리 특집 자체는 전편인 하와이 특집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일찍 와주기 바라’는 혁명의 시발점 삼을 만했다. 당시 모든 쇼는 무대 뒤를 보여주지 않았다. 쇼는 조명 아래에서 좋은 것만 비추는 것이 패러다임이었다. 박 치는 소년이나 하와이 주민을 병풍으로 세워둘지언정 그것은 쇼 앵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찍 와주기 바라’는 기존의 앵글 밖의 일이었다. 앵글 안에서 현실과 쇼의 구분이 없어지는 그 지점에서 [무한도전]의 본격적인 색깔이 우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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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8일 발리특집


우선 놀랐다. 약속 시간은 10시인데, 그것을 지킨 사람은 6명 중 두 명뿐이었다. 약속 시간을 어기는 것이 일상인 그들의 문화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각한 멤버들이 변명하는 것을 보면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하는 것은 카메라가 없을 때는 ‘그래도 되니까.’로 해석되었다. 오죽했으면 ‘일찍 와주기 바라’라는 깜짝 특집을 준비했을까 싶었다.


지각은 남의 인생을 함부로 낭비하게 만드는 짓이다. 약속 시간을 지킨 사람은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다. 스마트폰 덕분에 낭비가 덜 지겨워지게 되었지만, 타인의 부주의에 의해 강제된 시간 낭비라는 본질은 변함없다. 더군다나 다수를 기다리게 만든다면, 지각자의 잘못은 기다리는 사람 수만큼 곱해져서 합산된다. 그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은 도덕 지능이 낮은 것이다. 자각하는데도 지각한다면 ‘헤헤헤’ 웃는 얼굴로 하는 갑질이다. 그래도 되니까 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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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8일 발리 특집. 지각자들 때문에 늦게 시작하는 것이 문화과 된 듯한 발언.


나는 시간에 예민했다. 과제 제출 마감이 12시라면, 12시 1분에 보낸 학생에게 F를 주고 싶다. 지각생도 결석 처리하고 강의실에 들이고 싶지 않다. 지각생 때문에 강의 흐름이 끊김으로써 수업 시간을 지킨 학생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은 부당했다. 물론, 내가 원하는 시간 준칙 수준이 예민한 것을 알기에 그 수준을 타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포기하게 되어(혹은 사회화 되어) 상대가 약속 시간에 늦으면서도 먼저 연락해오지 않아도 그러려니 하지만, 불합리에 대한 내구력이 증가한 것이지 싫은 건 싫은 거다. 시간관념이 흐리다면 우리가 두터운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은 낮다.


과외 하던 시절, 수업 한두 시간 전에 수업 불가 통보를 해오는 경우, 비참했다. 마음속으로는 ‘네~ 그럼 수업 때려치웁시다.’라고 하고 싶지만, ‘네~ 그럴 수도 있지요. 일정 어떻게 변경할까요?^^’라고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수업 하러 이동 중이라면 더욱 더 납득되지 않았다. 상상에 실형을 물릴 수 있다면, 나는 사형이었다. 그들의 심리도 [무한도전] 멤버들과 비슷했을 것이다. 부끄럽거나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그래도 되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스텝들을 생각했다. 촬영 준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출연자보다 일찍 와서 대기해야 하는 것은 자명했다. 그것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 지각한 노홍철, 박명수, 정준하, 하하는 그동안의 예능 문법에 없던 타이밍에 켜진 카메라에 당황해했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눈앞의 상황만 모면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촬영 시간과 아무 상관없는 시청자들에게 허리 숙일 뿐, 스텝들에게는 사과하지 않았다. 갑을관계는 비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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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는 무례한 구제불능이었다. 최초의 ‘일찍 와주기 바라’에서 가장 늦었다. 연예계에서는 인기가 권력이라고 하던데, 하하는 그럴 급도 안 됐다. 당대 톱MC이자, 자신이 존경한다는(아직 무한 재석교가 형성되기 전이지만) 형을 기다리게 만드는 속내는 이해할 길이 없다. 심지어 팀에서 가장 어렸다. 어린 사람이 더 일찍 와야 하는 법은 없지만, 노홍철을 통해 ‘일찍 와주기 바라’ 촬영 중인 것을 들었으면서도 글로브 박스에 발을 얹은 채 등장하는 모습은 꼴사나웠다. 같은 해 납량 특집에서도 가장 늦었고, 수능 특집에서도 박명수 직전에 도착해서 겨우 꼴찌를 면했다. 하하가 욕을 덜 먹은 것은 군입대로 공백이 생긴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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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8일 발리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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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5일 폐교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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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7일 수능특집, 2006년 11월 11일 수능특집. 하하 혐오의 시작


정준하는 무참한 구제불능이었다. 이날 최코디는 8시에 정준하 집 앞에 도착했지만, 정준하는 8시 50분에 출발했다고 한다. 10시까지 모여야 하는데, 촬영장까지 두 시간 걸리는 길이었다. 이후에도 정준하는 한결같이 늦었다. 07년 8월 4일, 그러니까 1년 2개월이 넘도록 이 습관은 바뀌지 않았다. 촬영 시작이 10시로 예고된 상황에서 9시 45분에 집에서 출발했다. 몰래 카메라 속 그의 느긋한 모습은 정시에 도착하면 짜증낸다는 최코디의 증언에 힘을 실어줬다. 물론, 당시 [거침없이 하이킥]과 사업을 병행하느라 피곤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신의 바쁨은 스텝들의 퇴근 시간은 무관해야 했다. 더군다나 당신이 바쁨으로 얻는 수익은 스텝 개인의 일당보다는 많았을 것 아닌가. 늘 죄송하다지만 말 뿐, ‘일찍 와주길 바라’는 2018년까지 이어져도 괜찮을 정도로 단물이 빠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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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8일 폐교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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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4일 폐교 특집. 1년 간 한결 같았다.


지각은 타인의 시간을 훔치는 행위다. 그런데도 이 절도질을 지적하면 피해자를 쪼잔한 사람으로 만든다. 1분이라도 늦을 것 같으면 미리 연락해서 양해를 구하는 것이 예의다. 정 없어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미 사회는 얇은 관계로 구축된 사회이므로 정이 아니라 신뢰로 연대하는 쪽으로 변했다. 16년이 흐른 지금, 하하와 정준하는 어떻게 변했을까? 변했다면 구제불능을 철회하고, 한 인간의 부모가 되었음에도 변하지 않았다면, 음.


나는 자산 20억이 없어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 돈만 있으면 시간의 예민함을 마음껏 드러냈을 텐데, 돈이 없어서 사회성을 유지한다. 내 리얼바리어티쇼는 참 답답하다.


조승우 사회 생활.jpg 왜 절도범 때문에 선량한 시민의 영혼이 분리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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