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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Dec 06. 2022

때깔 좋은 귀신으로 살면 어때서

어서 끝내고 싶었다. 눈 뜨면 수업했다가 잠깐 눈 감았다가 눈 뜨면, 또 수업이 이어졌다. 자고 일어나면 이 중노동의 날이 생략되어 고요해져 있기를 바랐다. 도라지배즙, 맥문동 가루, 프로폴리스 스프레이, 빨아 먹는 목 감기약, 한약 형태의 목 감기약에 의지해 마른기침을 버텼다.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을 팔아 노후를 구매하는 것이 합리적인지를 따져 보면 허망했다. 그러나 생애 소득 정점은 43살이고 61살부터 적자 인생을 살아간다는 통계는 지엄했다. 내가 언제까지 벌 수 있을까. 충분히 먹고 살면서도 먹고사니즘에 쫓겼다. 음흠, 음흠, 마른기침이 인생의 방귀 같았다.



방귀가 잦아 똥 나왔다. 잊히기 위한 시간을 뿌지직 싸고, 그것을 다시 꾸역꾸역 먹는 듯했다. 반복되는 일상은 먹어도, 먹어도 마음이 허기졌다. 현재를 사는(live) 것이 미래를 사는(buy) 것이 되고 보면 인생은 할인되어 싼 것인지, 똥처럼 싼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변기 물 내리듯 매일 밤 오늘을 청산하는데도, 살아도, 살아도, 오늘이었다. 다만 내가 좀 낡아 있었다. 사람 냄새, 그건 방귀도 나눌 수 있는 친구들과 있을 때나 났다. 잘 소독된 병원 냄새 같은 일상은 부패를 잊었다.


나는 자발적 기억 도살자였다. 인생의 성패는 금전의 부가 아니라 기억의 부로 측정되지만 반복되어 늘 같은 일상은 기억될 수 없었다. 나는 내게 인생을 걸어온 학생들에게 열성을 부었으나 그 시간은 ‘수업했다’라는 단어로 축약되었다. 학생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당락으로 표지될 뿐이다. 개인의 인생은 시간이 개별 기억으로 환원되는 우주의 우연이고, 기억은 시간에 붙은 표지이고, 이 표지의 총합이 우주에 존재했던 필연의 찰나이다. 표지되지 못한 음흠, 음흠, 마른기침의 시간이 벅찼다.


이 기간 동안 시간은 숙제처럼 왔다. 점심으로 버텼다. 숙제할 때 벽지 줄무늬 관찰하는 일도 재밌는 법이었다. 식사의 순간들은 기억에 남지 않지만, 어차피 무(無)로 휘발될 시간이라면, 잠깐이라도 반짝거리고자 했다. 평소라면 사 먹지 않을 가격대의 음식을 점심으로 먹었다. 딴딴하게 부른 배를 문지르며 강의실로 돌아오는 길에 콧노래가 나왔다. 복지리를 먹고 나오며 ‘아, 좋다!’고 해버린 날, 자존심이 상했지만 살아 볼 힘이 났다. ‘오늘 뭘 먹었다.’로 위로 받았고, ‘내일 뭘 먹어야겠다.’로 희망을 품은 것이다. 어차피 기억되지 못할 시간들이라면 잘 먹고 살 싸는 것이 천하제일 인생 아닌가, 회의했다.



먹는 걸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식사는 허기를 제거하는 성가신 숙제였다.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허기 채우기를 넘어선 먹이 집착은 인생을 생물학으로 폄하하는 자해로 여겨 왔다. 자아실현의 기치 아래서 생물학을 따르는 인생은 자기 가치 할인의 자백이었다. 인간이 고작 배부른 돼지가 되기 위해 태어나서는 안 되었다. 고작 먹방이라니, 천하의 개돼지들. 할인된 자신에게서 자괴감도 느끼지 못하는 저렴한 습성에 거리를 두고자 했다.


카카오-페이스북-인스타그램의 카페인 우울은 나와 무관했다. 싸이월드 시절부터 음식 사진 찍는 문화를 내심 인생을 할인하는 반자아적 미개함 취급했다. 때때로 동조했지만, 생각 없이 베스트셀러를 따라 읽은 것처럼 찜찜했기에 가급적 삼갔다. ‘먹스타그램’이 되어버린 타인의 SNS를 보고 있으면 인생에 내세울 수 있는 게 먹는 것밖에 없나 싶어 측은했다. 17시간 후의 똥을 귀하게 여길 정도로 인생이 보잘 것 없어진 것을 자백하는 무구함에 동정하듯 ‘좋아요’를 눌렀다. 물론, 더 이상 그 오만함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좀 더 일찍 인정했어야 했다. 인생은 대단할 것 없다. 유진(幽眞) 똥이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죽음 앞에서는 다들 똥 만드는 유전자 기계다. you know? you know? 이제는 내게 두 번 물어도 별 수 없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인생의 진리다. 인생의 핫이슈는 잘 먹고 잘 싸는 게 다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야, 간다, 와다다다다다다다 맨발의 성취감은 97년 IMF와 함께 끝났다. 경제 성장기가 아닌 한, 결과는 노력을 배신할 확률이 높으므로 먼저 배신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아니, 본성을 회복하는 일이니 배신도 아니다.


자아(自我), 그 놈에게 속은 거다. 각자 무상(無償)으로 받은 시간을 싸다가 죽는 무상(無常)함을, 우리는 자아무쌍(自我無雙)만이 진리라고 속아 온 것이다. 자아라는 것 자체가 self를 배제한 ego의 고집에 지나지 않았다. 태어나려는 것이 깨어야 할 알은 ego이고, 새가 날아가 만나야 할 아브락사스에는 self가 결핍 되었다. self, 그러니까 개인의 심연이 폭발하면 그것대로 문제 되겠지만, 문명은 심연을 부정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자아실현은 진화 심리학적으로도 현생 인류에게 맞지 않는 지도 모른다. 원시 인류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생존 기계로 살아 왔다. 자아실현은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자의 한가한 특권이었다. 노비나 평민은 억압 받으며 생존하기 급급했고, 귀족이나 왕족도 사실 개인으로서의 나보다 가문으로서의 나로 살아왔다. 교과서적 자아실현은 인류사에서 100년이 될까 말까한 신생 정신 질환인 셈이다. 이상 자아를 꿈꾸지 않았다면 현실 자아가 비루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현실 자아는 보다 ‘지금 여기’에 튼튼히 뿌리 내려 하루의 맛있음에 충실하게 살았을 것이다. 이상 자아가 신기루였다는 걸 인정하고 보니, 이상 자아 때문에 도서관과 방구석에서 학살한 내 기억이 아까웠다. 어차피 잊힐 기억이라면 맛있기라도 하든가.


자아실현을 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어차피 생물학을 초월하지 못했다. 유재석은 자아실현을 한 사람 중 하나고, 매주 특집이 되었던 [무한도전]만으로도 내 20-30대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풍부한 기억 부자로 살았고, 지금도 그리 살고 있지만, 그가 라면을 후루룩 거릴 때, 인생은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았다. 유재석조차 라면 한 젓가락에 저리 행복해 하는데 내가 뭐라고. 방구석에서 먹방과 내게 난폭하게 굴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죽을 거다. 죽기 전까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나. 만수산 칡냉면이나 야무지게 먹을 것이다. ‘멍멍’, ‘꿀꿀’은 내 졸문보다 솔직하고 확실한 자신이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별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듯, 죽어야 할 것이 아름다운 것은 어둠처럼 사라질 기억에 맛있는 것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우겨보고 싶다. 죽어야 하는 산 자의 우울을 달래는 위로의 기본 단위는 ‘맛있는 것’이다. 인생의 정답은 사랑이라지만, 사람이 어려워 사랑은 희귀하다. 그러나 맛있는 것은 지천이다. 칙칙한 내 인생을 위해 누르는 가장 확실한 ‘좋아요.’, 먹는 게 남는 거다.


2022년 11월, 생애 처음으로 끼니와 군입거리를 위해 월 40만 원 남짓 썼다. 연 60마리의 치킨을 먹을 때도, 쌀 20kg을 팔던 때도 찍어보지 못한 고지였다. 런치플레이션의 시대, 그리 대단한 금액은 아닐 수 있겠지만, 내 깜냥에는 꽤 대견한 한 발짝이었다. 이 비용을 치를 수 있어서 아직은 다행이다. 나도, 기대할 내일이 생겼다. 내일은 복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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