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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Dec 13. 2022

복국 - 아저씨의 완성

아줌마에 비해 아저씨는 일찍 찾아온다. 멀쩡한 스물한두 살짜리 남자도 군복만 입히면 아저씨 바이브(vibe)를 흘리기 마련이다. 양심이 있다면 그다지 억울할 일은 아니다. 원빈도 ‘아저씨’다. 어지간한 청년 남성들은 아저씨가 아닐 명분이 없다.


부산에서 자란 이유로, 나의 아저씨는 ‘부산 아재’ 이미지다. 부산 아재는 누군가 돼지국밥을 먹을 때 ‘정구지’를 깨작대고 있으면, 굳이 나서서 ‘와, 돌아삐겠네. 보소, 단디 스까 무야지 그기 머꼬?’라며 제대로 된 부산 돼지국밥을 선사할 것 같다.


거친 오지랖에 악의는 없다. 무례함과 호의를 넘나드는 ‘제대로’는 자기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사노라면, 일상의 순간에 자신만의 방식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저씨들의 방식은 생계의 최전선에서 사회와 맞짱 떠가며 몸으로 익힌 스타일이므로, 자기 확신은 군복의 규율이자 스타일을 넘어선 자기 존재 양식에 가깝다. 이 방식을 공유하는 사람은 전우다. 나를 인정해주는 전우에게 관대해진다. - ‘바라, 그리 무우니 을매나 맛있노?’


아줌마들은 음식 자체를 나눠 먹고자 한다면, 아저씨들은 음식을 먹는 방식을 따라주길 바라는 듯하다. 자기 영역을 주장하는 수컷의 본능을 닮은 권위의 기미를 풍긴다. 별 볼 일 없는 아저씨로 살아가면서 무시되기 십상이었을 권위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줄기차게 자기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확신이 부럽다. 나는 짜장면은 짜장면이고, 국밥은 국밥이어서 무엇을 먹든 자기주장이 없는 편이다. 탕수육 소스를 찍어 먹든 부어 먹든, 프라이드든 양념이든 약간의 호불호가 있겠지만 괘념치 않았다. 


그런데,

“양념장은 빼고 주세요.”

“비빔장 말씀하시는 거죠?”

“아? 네.”

-라니. 


2022년 11월 문득, 내게 새겨져 있는 사소한 확신을 발견했다. 하필 복국이었다. 복국은 아저씨를 완성시키는 음식이다.


복국을 처음 먹은 것은 대학생 때였다. 지도교수님이 사주셨다. 복어는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왜 목숨 걸고 먹는지 의아해 하며 찜찜했던 기억만 날 뿐, 맛은 기억나지 않았다. 인상 깊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맛을 모를 때, 아니, 아직 필요하지 않을 때, 한 마디로 좋-을 때였다.


15년인가 20년이 흐르고 나니, 복국은 내 입에 꼭 맞았다. 맛으로서의 복국은 올 10월에 처음 음미했다. 아침에 혼자 맥주 한 병 하고, 친구들과 이른 점심으로 복국을 먹었다. 나는 주량껏 마신 셈이어서 이미 얼굴이 터질 듯 뻘겠다. 맥주를 물처럼 마시던 친구들은 나를 한심하게 보며 피식댔고, 나는 복국에 진지했다. - 숙취해소 해야 된다.


술에 취해본 적 없어 해장을 모르고 살았다. 술은 취기 없는 순수 독이었다. 대학생 때나 사회 초년생 때는 강제로 마심을 당했고, 뻘게졌고, 머리가 아팠고, 토했다. 토하고 한두 시간 지나면 창백해졌다가 혈색이 돌아오므로 아침은 늘 멀쩡했다. 술자리를 무사히 넘겼다는 해방감으로 해장을 대신했다.


복국의 날,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해장을 알았다. 5도짜리 맥주 330ml을 한 시간에 걸쳐 나눠 마신 덕분에 두통 없이 얼굴만 뻘겠다. 어쩌면 창백해질 타이밍에 복국을 들이켠 것인지도 모른다. 맑고 따뜻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졌다. 붕 떠 있던 몸이 나른한 듯 가뿐해지며 내 몸이 진짜 내 몸처럼 편안해졌다. 이날 내가 복국을 어떻게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복국은 허겁지겁 타당했다.


11월에는 사 먹어야 하는 점심 중 절반 이상 복국을 먹었다. 혼자 먹으니 메뉴는 지갑과 상의해야 했지만, 일상적으로 지불하는 한 끼 비용을 초과해도 무시했다. 이미 복국이 아니면 아니게 된 몸이었다. 돼지국밥은 걸쭉하고 무거웠지만 복국은 맑고 가벼웠다. 이미 삶이 묵직해서 부담스러워진 나이에 몸으로 가붓이 스미는 투명한 온기를 거부할 수 없었다.


내가 이해한 복국은 고급 콩나물국밥이다. 콩나물국에 복어 세 도막이 들어가고, 미나리로 향을 낸다. 여기에 다진 마늘이 밀도 높게 더해진다. 식재료가 가득한데도, 더군다나 국물에 멸치 떼처럼 풀린 다진 마늘이 눈에 보이는데도, 국물이 맑아지는 모순은 복어 독만큼 이해되지 않았지만 속수무책으로 좋고, 좋고, 좋다. 아저씨 외통수다.


복국을 먹기로 작심한 날은 아침을 굶거나 간단하게 때운다. 내가 가는 복집은 착석하면 홍합탕과 다섯 가지 밑반찬을 내준다. 복국이 나오기 전까지 음식을 먹어 치우는 속도전이 시작된다. 맨손으로 홍합을 깐다. 맨살의 홍합이 퐁당퐁당 들어있는 홍합탕을 쭉 들이켠다. 두어 모금쯤 남긴 뒤 홍합을 한 입에 우걱우걱 씹어 삼킨다. 남겨뒀던 국물로 입가심하는 것으로 애피타이저 2막을 연다. 계란찜 두 블록, 시금치나물, 애호박볶음, 어묵볶음(혹은 메추리알 장조림), 쥐포 채(혹은 명란젓), 양배추 샐러드를 하나씩 비워가며 빈 그릇을 쌓아 나간다. 쥐포 채가 나오면 다 비우고, 명란젓이 나오면 아껴 뒀다가 간장 대신 복어 살과 먹는다.



복국이 나올 때는 상을 비워 빈 그릇 탑을 쌓는다. 직원은 상에 밑반찬이 없어서 어색하다며 뭘 더 줄지 묻지만, 나는 괜찮다고 한다. 복국은 복국만으로 충분하고, 직원에게 충분히 미안하다. 1인상 차림이나 2인상 차림은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나는 늘 1인이다. 게다가 복국은 음식만 전달하고 끝내는 다른 음식과 달리 넓적한 냄비에 끓여 낸 다음, 상으로 가져와 비빔 그릇과 국그릇에 일일이 퍼줘야 해서 손이 더 간다.



비빔 그릇은 내게 국그릇이다. 비빔 그릇의 빨간 양념장을 걷어 낸다. 양념장을 빼달라고 주문해 봐도 미리 준비해 놓은 그릇에 양념장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그릇을 내주기에 다음부터는 말을 말았다. 콩나물국밥이나 돼지국밥을 먹을 때도 양념장을 풀지 않는 편이다. 양념장을 풀지 않아야 김치 들 자리가 났고, 복국에 김치는 먹지 않으므로 양념이 약간 섞인 국물도 상관없다. 국밥으로 전환될 준비가 되면 비빔 그릇에 공기밥, 냄비에 남은 콩나물과 국물을 다 쏟아붓는다. 복(福)향 은은한 콩나물국밥이 완성된다.


내가 복어향을 구분할 줄 아는 미식가는 아니다. 그저 한 냄비에서 콩나물 무더기와 복어가 나왔으니 복어향이 배었거니 하고, 복어를 복(福)어로 읽는 것은 내 마음이다. 입이 복되어, 먹고 나면 한 시간은 온몸이 복되므로 전혀 틀린 플라시보는 아니다.


본게임이 게걸스럽게 시작된다. 복국에는 콩나물국밥보다 더 많은 콩나물이 들어 있다. 면치기 하듯 입에 우겨넣다 보면 국물이 사방으로 튀기도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먹는다면 조심하겠지만, 혼자 먹으므로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건 대접 바닥을 향한 꺾이지 않는 속도다. 국물을 남기지 않는다. 애초에 국물이 본질인 음식이다.


복어 살은 후식이다. 처음에는 뼈다귀해장국 먹듯이 살을 발라 국과 함께 먹으려 했지만 복어는 살이 단단해서 국에 풀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밥을 다 먹은 후 한 손에 복어 도막을 들고 뜯어 먹는다. 밥을 먹는 동안 복어는 손에 들어도 될 만큼 식어 있고, 척추 사이를 꼼꼼히 발라 먹기도 손을 쓰는 것이 수월하다. 결대로 부서지는 생태나 대구와 달리 복어는 끝까지 뭉쳐져 있어서 쫀득하다. 과장 좀 보태면 단백질 젤리 같다.


살은 고추냉이를 섞은 간장 양념에 찍어 먹는다. 회나 초밥을 먹을 때보다 고추냉이를 적극적으로 찍는다. 살덩이는 고추냉이의 날카로운 알싸함을 우직하게 품어낸다. 간장은 잘 묻지 않아 흥건히 찍어도 싱거웠지만 애초에 짜게 먹는 편은 아니어서 그러려니 한다. 명란젓이 나올 때는 간장 소스를 만들지 않고 짠 맛에 먹는다. 두 방식 사이에 호불호는 없으므로 식당에서 명란젓을 주지 않는 한 요청하지 않는다. 그저 빵과 우유를 먹듯이 살과 국물을 번갈아 먹고, 홍합탕을 먹듯 국물 마지막 한 모금으로 우물우물 입가심하는 것으로 식사를 마무리 한다. 20분 내에 국물만 1리터 넘게 먹은 셈이니 배가 안 부를 수 없다.



대체로 든든하지 않은 세상살이다. 장애인, 여성, 아동, 청소년, 노인은 소수자로서 삶이 고난하겠지만 세상이 그 고난함을 알아준다. 제도권 안에만 들면 나름의 보살핌이 전제된다. 그러나 아저씨를 위한 제도는 없다. 탈가부장사회라지만 평균적 아저씨에게는 ‘남자가 얼마는 벌어야 한다’는 가부장이 남았다. 대기업, 공기업, 전문직이 아닌 90% 이상의 아저씨는 낙오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참, 춥다. 낙오되지 않으려 사표는 가슴에만 묻는다. 묻는다, 내 편은 없나? 내가 내 편이기는 한가?


내 방식대로 먹는 무언가, 아저씨의 내 편 한 그릇, 복국이다. 세상이 해장된다. 누군가에게는 짬뽕, 파스타, 마라탕, 떡볶이일 수 있겠지만, 내게, 일단은 복국이다. 손님 중에 내 또래가 드문 것도 좋다. 막둥이가 되어도 좋을 것처럼 안온하다. 복국 한 그릇 충전하고 배를 문지르면 소심하게 끄적여 볼 용기가 생긴다. 한 때는 꽤 당당했는데 – 난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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