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평일 9시 스타벅스 3층까지 올 부지런한 학생은 드물었다. 1시간 반 정도는 이 공간을 독점했다. 카공족이 한둘씩 차는 정도의 오염은 소화할 수 있지만 조용한 인간도 소음의 잠재태(態)이므로 역시, 아무도 없는 것이 최적이다. 나는 커피가 아니라 나 아닌 이물질이 없는 빈 공간에 비용을 지불했다. 빈틈 속에 홀로 깨어 있는 고고함이 맛있다.
내가 어떤 장소에 애착을 가진다면 조용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 골방에서 15년을 머무는 것(이번 달에 건물주가 바뀌면서 네 번째 건물주를 맞았다)도, 12시에서 1시 사이의 점심을 피하는 것도, 조조나 심야로만 영화를 보는 것도, 봄/가을에나 바닷가에 가는 것도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대학생 무리를 보고 있으면 ‘사이오닉 스톰’이라도 쓰고 싶었다.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 무질서는 폐기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내게 인간은 감히 자신을 주장하는 시끄러운 사물들이다, 대체로. 모든 사물들은 내가 호명하기 전에는 조용히 형상 속에 머물고 있지만, 인간은 내 의사와 무관하게 나와 합의되지 않은 개성을 드러낸다. 나는 네 개성에 관심 없고, 네 인권은 소중하지 않다. 인권은 사회적 발명이지, 내 필연은 아니다. 사회적 합의 때문에 오염원을 적출할 수 없으니 내게 무례한 것들을 피하는 것이 사회성의 최선이다. 테이블, 의자, 액자, 전등은 내게 무해해서 좋다.
20대 때, 모교 중앙도서관의 오전 6시를 좋아했다. 중앙도서관은 6시에 열었다. 나는 가장 먼저 가서 4층 불을 켜곤 했다. 공강에 스쳐 지나가는 뜨내기들이 꼭대기까지 오지는 않았다. 4층은 수험생들이 진을 쳤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같았다. 암묵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조용한 사물이 되어줬다. 사물을 수행하다 보면 내적 유대가 생기기도 했다.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각자가 앉던 자리를 빼앗지 않는 것으로 서로를 환대했다. 나와 송은 누구누구들에게 닉네임을 붙여 그들의 안부를 가십 삼기도 했다. 공시생이던 송은 아침 7시에 가서 오후 10시까지의 루틴을 기계처럼 지켰고, 나는 아침 6시만 수호했다. 인간들에게 범해질 눈밭 같은 고요에 뚜벅뚜벅 찍는 존재감, 겨우 그런 게 필요할 정도로 자존감이 낮아진 것인지 몰라도, 자아가 확대되는 실감의 풍미는 가난한 지갑으로 살 수 있는 가장 큰 효능감이었다.
가장 거대한 자아는 코로나 팬데믹 동성로에서 음미했다. 대구에서 신천지로 감염자 수가 폭등하며 집단 공포감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책을 급하게 구매해야 할 일이 있어 동성로에 갔다, 토요일 오후에. 대구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아야 할 순간, 지하철도, 대백 앞도, 교보문고도 휑했다. 다크투어리즘을 즐기는 관광객의 기분으로 동성로를 활보했다. 내가 최후의 인류라도 된 것 같은 착각, 평일 오후 9시 스타벅스 3층에도 있었던 것이다. 스타벅스가 오전 6시에 문을 열면 좋겠다.
인간 부재, 이것이 스타벅스에 출근도장을 찍다시피하는 요즘을 온전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내 방만큼 타인이 부재하고 조용한 공간도 없다. 미세먼지도 없는 요즘은 창을 열어두면 나뭇결을 쓰다듬는 바람에 참새, 두견이, 소쩍새 소리가 어우러져 작업하기 최적 조건이 갖춰진다. 이불 개고 창문만 열면 서재가 되는 공간을 굳이 나와 스타벅스에 가는 것은 직원들 때문이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환대를 충전 받고 있었다.
“드시던 거 하면 될까요?”
직원은 이미 포스기를 찍은 다음이었다. 어, 날 알아보네, 왜?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너덧 명의 직원들은 비주기적으로 바뀌었는데도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나를 아는 티를 냈다. 나는 그저 익명으로 존재하고자 했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자리를 무한정 차지하고자 함 때문은 아니었다. 자리가 절반 정도 찰 즘의 소음에도 나는 자리를 피했다. 내가 그들에게 표지된다는 사실이 상호성에 근거해 나도 그들을 표지해야 하는 의무를 요청받는 듯했다. 나는 그럴 의사가 없었기에 성가셨다. 여긴 인간 부재의 공간이어야 했다.
그러나 편했다. ‘네.’ 하나로 주문이 해결되었다. 인격으로서 수행하는 직원-손님의 역할극을 최소한으로 줄인 것이다. 어차피 나는 주문 후에 3층으로 올라가니 우리는 분리되었다. 3층에서 다시, 나는 표지되지 않은 사물로서 노트북을 두드리며 본래 하던 대로 인간 부재를 섭취했다. 직원들의 알아차림에 내 손실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드시던 거 하면 될까요?’는 환대로 읽혔다.
어느 가게를 가나 직원(사장)은 손님을 환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외국어교재 다이얼로그에서 반복될 만한 담화 의례다. 인격과 인격의 대면으로 존엄성을 상호작용할 뿐이다. 존엄성은 기본적인 수준만 충족되면 되므로 시장 자본주의의 미소가 더해지는 것에 큰 의미는 없다. 인격의 의례는 개성으로서의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 동네 스타벅스 직원들은 ‘아메리카노 그란데 따뜻한 것’으로 나를 건드렸다. ‘나를 알아차리고 나를 중심에 두고 예상한 대응’의 ‘배려’, 곧 환대였다. 매뉴얼에 따른 직원의 미소가 익명의 벽 안쪽으로 번져왔다.
우정은 환대의 확장형으로서, 상대의 감정이나 행위를 예상하고 배려하는 것으로 상호연대 하는 감정 수행이다. 시간이 갈수록 우정이 깊어질 수 있는 것도 경험으로 쌓은 빅데이터가 예상의 정확도를 높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대하는 엄마의 환대도 같은 공식으로 이해된다. 타아로부터 자아를 예상 받고, 자아가 능동적으로 타아를 배려할 때, 자아는 훼손되지 않는다. 우정은 서로의 자아 영역을 넓히는 공리를 실현해내는 것이다.
스타벅스에서 받는 내 환대는 우정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환대 자체가 특이 경험이다. 내 일상 속에서 나는 환대 받지 못한다. 내가 타인을 환멸하면서 환대 받기를 바라는 것은 황금률에도 어긋나니 투정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환대 경험의 상실은 나이가 받는 보편적 의례인 듯해서 뻔뻔하게도 따져 봤다.
대로변 편의점 앞에서 대학생들이 길고양이 먹이를 나눠주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양말 팔이 노파를 본 적 있다. 고양이 먹이에 든 비용과 노파의 순수익을 비교해 보면 늙은 것은 죄가 되었다. 환대는 어리고 귀여운 것들을 향한다. 대부분의 출생은 환대 속에서 이뤄지고, 어린 것들은 우르르까꿍 무조건적으로 귀여웠고, 스무 살들은 대학 ‘새내기’로서 환대 받았다. 대충 거기까지였다.
이후의 나이는 환대가 적대로 변해가는 것에 길들여지는 시간이었다. 세계는 내게 존재의 책임을 요구했다. 나는 물리적으로 존재해야 하므로 돈의 쟁탈전에 참전해야만 하고, 돈의 병사는 사회계약 상의 인격일 뿐, 나로서의 개성이 아니었다. ‘나를 찾아 떠나는’류가 난립하는 것은 자유가 보편화 된 시대에 ‘나’를 의식하는 만큼 자기 결핍이 상대적으로 크게 체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대가 필요했다. 환대로 마무리되지 않는 자유는 공허하다, 나처럼.
가족은 내가 환대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지만, MZ로 표상되는 인간들은 오만하고, 빈곤해졌다. 타아를 들이지 못하고 자신에게 ‘맛집’과 ‘인스타 감성’을 처바르는 것으로 환대를 연명하는 하찮음이 가엽다. 이렇게 또 타인의 개성(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유행에 휩쓸린 대중적 습성)을 환멸하기에, 환대의 경험이 귀하고, 고맙다.
“어, 오늘은 텀블러 안 들고 오셨네요?”
저 한 마디의 아는 채가, 하지만 결코 직원-손님의 담화를 넘지 않는 안정적 거리감이, 내 날 선 단어를 사포질 해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견딜 수 있는 소소한 백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