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쓴이 vs 가르치는 이
내가 누군지 확실해졌다. 예상했지만 명백한 증거를 마주하고 보니 허탈했다. 역시 네가 본체였다, 쓰는 이. 쓰는 이는 혼자를 배설하고 혼자를 먹으며, 혼자가 응결된 종양이다. 종양 주제에 천상천하유아독존, 내가 아닌 모든 닝겐(にんげん.인간)들이 하찮았다. 그러나 내가 더 하찮기에 노트북 안에 꼭꼭 숨었다.
“쌤! 저 금상이에요!”
중학교 3학년짜리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전화 너머에서 자기감정을 어떻게 분출해야 할지 모르는 막무가내의 몸부림이 전해졌다. 장례식에서 곡을 하는 것처럼 감정에도 표현 양식이 있다. 학생은 처음 겪는 감정 폭풍을 표현하는 방식을 학습한 적 없었을 것이다.
고등부에서는 매년 겪는 일이다. 대학 합격은 10대의 평생소원이었다. 더군다나 논술 전형은 50:1은 기본이고, 100:1까지 어처구니없도록 경쟁해야 하는 아수라였다. 그곳에서 생존 소식을 전하는 학생들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의 폭발을 어찌할 줄 몰랐다.
어, 어, 어…… 너무 좋아요. 어머님조차 애가 말이 너무 없어서 수업하기 힘들지 않느냐고 걱정하셨던 학생도 재수학원 알아보다가 연세대 경영학과에 추가 합격된 후에도 흥분이 어정쩡했다. 소리 치고 방방 뛰는 것은 내 나름의 기쁨 표출 양식을 적립한 내 쪽이었다.
선생으로서 내 첫 학생의 합격 소식을 전달 받았을 때, 나는 과격했다. 씨발, 축하해! 등골에서 쭉 뻗쳐오는 소름을 있는 그대로 외쳤다, 지하철 안에서. 예체능 하다가 3학년 때 공부로 길을 틀어 내신 7등급 찍던 학생을 경북대에 합격시켰을 때였다. 그 다음해든가, 평소에 1등급 대를 무난하게 찍다가 수능을 망쳐 재수하고서 또 수능을 망친 학생이 수능최저등급이 폐지된 한양대 124:1을 찢었을 때도 ‘씨발’은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선생은 나를 긍정하는 최적 양식이었다.
“오, 축하해!”
이번에는 축하를 쥐어짜냈다. 학생이 응모한 독후감 공모전은 내가 아는 한 정기적으로 열리는 독후감 공모전 중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컸다. 거기서 1등이면, 고등부에 적용했을 때 내 기대 기준 연세대 합격 이상 가는 성과였다. 그러나 학생의 수상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급격히 식어갔다. - 나는 연락 못 받았는데?
나도 일반부에 응모했었다. 대상을 기대했었다. 학생들 독후감이나 입시 논술 답안은 주최 측이 제시하는 결과물을 분석했지만, 유독 내 글은 그러지 않았다. 내 스타일이 먹히지 않을 것 같으면 애초에 업계에 발 들여 놓아 봤자 소용없다는 게 지론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 수상작까지 검토했었다. 주제 전달을 위해 독후감 속에서는 친구도 자살시키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가지며 거짓을 남발했지만, 이번에는 애초에 진심을 담으려고 내 경험을 덧댈 수 있는 책을 읽고 썼었다.
중등부부터 연락을 돌렸을지 모른다며 홈페이지로 찾아 들어갔다. 공지사항 상단에서 대상이 내가 아님부터 확인했다. 중등부를 훑어 내려오는 중에 아는 이름 하나를 더 봤다. 중학교 2학년짜리가 은상을 탔다. 내 학생이 금은상을 나눠 먹었으니 내 생에 다시없을 성과일 수도 있었지만 기쁜 줄 몰랐다.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수업 중이었는데도, 실망이 수습되지 않아 10초쯤 멍하게 있었다. 학생들은 내가 오버하며 웃긴다고 키득댔지만, 내 솔직한 얼굴이었다.
선생님은 왜 자신을 그렇게 할인해서 말씀하세요? 작년, 학생의 물음에 나는 내 늙은 자취생 신분으로 대답한 적 있었다. 가치가 있다면 아무도 안 주워가는 이런 폐기물이 되었겠느냐며. 그것이 질문의 본질이 아님은 나도 알고 학생도 알았지만 농담으로 마무리되는 대화 의례를 학생은 잘 이해하고 후속 질문은 하지 않았다. 역시 문맥을 이해하는 내 학생다웠다.
만성이 된 우울과 열패감의 출처는 글쓰기다. 대입/편입 논술에서는 ‘내 실력에 1억 원도 못 버는 것은 부당하다.’며 뻔뻔할 수 있지만, 글쓰기에서는 허풍이 쳐지지 않는다. 졸고를 읽어주는 몇몇 분 덕분에 간신히 ‘하루오’를 건사할 뿐이다. 준거 집단 내에서 이렇게까지 무능한 위계를 차지하는 것은 필라테스를 제외하면 글쓰기가 거의 유일했다. 자발적으로 열등해지며 불행해지는 선택은 이미 내 생태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 생태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혼자’로 방치되는 것은 재고해야 할 문제다.
나는 지나치게 혼자다. 주말에 수업을 몰아서 하고 나면 평일은 백수에 준했다. 혼자는 뒹굴거리거나 글을 썼지만, 뒹굴거리는 것과 글쓰기는 결과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둘 다 종양처럼 끝없이 자기복제를 거듭하며 무럭무럭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종양은 외롭다는 닝겐들이 한심하다. 자기 자신을 찾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치들 머리에 총구멍이라도 내주고 싶다. - 지나친 혼자는 이렇게 위험하다.
‘나’는 타인과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화합물이므로 순수해서는 안 된다. 순수는 외부를 배척한다. 닝겐들이야 불순물 범벅 속에 살고 있어 혼자가 갈급하지만, 나는 혼자가 흔하다. 혼자는 ‘나’의 원재료일 뿐이다. 라면도 물을 끓이고 스프를 넣고 면을 익혀야 음식이 되듯, 원재료는 다른 재료와 뒤섞이며 변형되어야 독자적 페르소나의 ‘이름’을 갖는다. 이름이 없는 인간은 인권을 부여 받은 생물이다. 익명의 생물에게 욕망은 있을지언정 자아는 없다. 먹고 싸다 죽는 생물학적 무의미, 그뿐이다. 그 혼자가 십 수 년 간 실패까지 껴입은 자아, 하루오였다. 글쓰기는 자아의 분말가루를 퍼먹는 것 같다, 물 없이.
하루오는 선생으로부터 온기와 물기를 충전 받았다. 선생으로서의 나는, 중학생들에게는 재밌거나 자상한 사람이고, 고등학생들에게는 신뢰할 만한 지성이었다. 학부모님들에게는 10대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어른이라는 평가도 종종 받았다. 더군다나 내게 수업은 노동이 아니라 놀이였다. 노는데 통장에 돈이 쌓였으니 스트레스 받을 일도 드물었다. 선생은 내가 행복해지는 존재 양식이었다.
두 페르소나는 상생했다. 선생은 인간 실격으로 침몰하는 하루오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고, 하루오는 촘촘한 실패들이 기록된 참고서가 되어 선생이 학생들을 틀리지 않게 이끌도록 보조했다. 둘은 동등한 인격으로 공생한다고 믿어 왔지만, 학생의 수상 소식을 내 낙선 사실이 뒤덮은 걸 보니, 우리는 공존할 수 없음이 확인되었다. 하루오의 주변인, 의미를 응결하지 못하는 헐거운 가짜, 카르페 디엠으로 휘발되는 시간, 선생이었다. 불순물이다! 혼자 면역체계는 사이토카인 폭풍을 몰아쳤다.
외로웠다.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루오를 아는 사람은 선생을 몰라 하루오가 말하고 싶은 선생은 존재할 수 없었고, 선생을 아는 사람은 하루오를 몰라 선생이 말하고 싶은 하루오도 존재할 수 없었다.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의 교집합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 경청해주는 이는 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또 써서 결국은 하루오였다. 꺾였다. 며칠 징징대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라고 쓰고 다듬는 사이에 그 며칠이 지났다. 중요한 건 꺾여도 계속하는 관성이다.
꺾여도 괜찮은 건 인간이 아니라 좀비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생기 없는 페르소나는 나를 질질 끌고 다닐 것이다. 어중간한 재능이 인생을 좀먹는 것은 알 바 아니다. 무(無)의 존재 양식이자 나의 장례 양식, 하루오. 머리에 총구멍이라도 내고 싶지만, 수상한 학생과 학부모들이 내게 감사를 전해 와서 나는 왜곡된 양식으로 살아 있다, 아무튼.
아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