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퇴근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리지
일요일 밤 8시 50분, 이번 주도 무사히 마무리했다. 한 주를 마무리하는 퇴근길은 늘 무거웠다. 지하철 안에서, 당신들은 내일 출근하나, 나는 쉬는데, 속으로 조롱해 봐도 소용없었다. 나는 책은커녕 스마트폰 볼 기력도 없었다. 그냥 눈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일요일이 잠들어 가는 정적조차 거슬렸다. 이어폰을 꼈다. 또, 『더 퍼스트 슬램덩크』OST였다. 서태지와 린킨파크가 질린 이상 별 수 없었다. 송태섭의 그 대사, ‘시끄러.’ 그래, 시끄러, 시끄러.
In the end, ‘돌파’인가.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에게 돌파, 그게 뭘까. 어떤 벽을 돌파해야 하며 벽을 뚫었을 때 도달한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니, 돌파, 그런 거 해야만 할까? 인생은 돌파된 적 없었다. 의지가 부러지고 또 부러지며 인생은 우여골절(迂餘骨折)을 거듭하며 흘러온 듯하다. 운이 없거나 운이 좋았다. 집으로 가는 길, 그야말로 ‘난 지금 무엇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걸까, 난 지금 어디로 쉬지 않고 흘러가는 가.’의 기분이었다. 난 내 삶의 끝을 본 적이 있다. 오늘도 one step closer 아마 고독사일 것이다. 묻고 싶지 않았다, What I’ve Done. 볼륨을 키웠다. 0번째 감각, 피곤하다.
밥 벌어 먹기 위해 애쓴 사실이 비참한 것은 철없는 투정이다. 통장에 찍힐 숫자를 생각하면 기만이다. 알지만, 등껍질에 2x2=4가 새겨진 벌레 이미지가 가시지 않는다. 등이 뒤집혀 다리 여섯 개와 더듬이를 바동거리는 벌레를 밟으면 으깨진 내장처럼 곰삭은 꿈이 악취를 풍기며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밟지 않는 이유는 동정심이 아니라 신발 바닥이 더러워지기 때문일 뿐이다.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고이 잠자고 싶었다.
학생이 많아지니 버거워졌다. InTJ지만 EsFP 역할극은 어렵지 않았다. 학생들이 내게서 E와 F를 끌어내 줬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학생들과 있을 때 나는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이 되었고, 나는 이 페르소나가 가장 좋다. 그러나 본성은 어딜 가지 않아, 그 역할을 유지하는 에너지 효율은 나쁜 듯했다. 육아 피로를 간접체험 한다. 여기에 어쩔 수 없는 결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강해야 하는 시간의 어긋남도 견뎌야 했다. 어쩌다 한두 번은 소화되었지만 학생이 많아지니 J는 가랑비에 기어이 인내심이 젖었다. 1학기 기말고사 이후 장마였다. 어쩌면 인간들은 재능이 아니라 역할극에 쏟는 인내심을 팔아 밥을 벌어먹는지도 몰랐다.
토요일에는 10시간 강의했다. 틈틈이 카톡과 전화로 학생들 질문에 대응했다. 아침 7시 40분에 출근해서 밤 10시 30분이 넘어서 들어왔다. 씻고 간단하게 요기하고, 다시 이메일로 출근했다. 쌓인 과제 8개를 처리했다. 목요일까지 보내라는 과제는 꼭 수업 직전에서야 보냈다. 시간을 어긴 과제를 볼 때마다 국립대 정교수가 되고 싶었다. 1분이라도 시간을 어긴 것들은 0점 처리할 것이다. 교수에 닿지 못한 무능함 덕분에 사회성을 유지한다. 알림에 뜬 숫자는 지워야 직성이 풀려서 일일이 확인하고 나면 졸피뎀 없이도 까무룩 잠들었다.
일요일에는 9시간 30분 강의했다. 같은 시간에 출근했다. 일요일 반은 유독 진지하고 조용한 학생들이 많아 나는 내게서 E, F를 더 쥐어짜야 했다. 문답식 강의에서 학생은 침묵하거나 속삭였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뭐라고?’라고 물어야 하는 사태와 대화 상대에게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밖에 성량을 내지 못하는 사정을 내 어린 시절 때문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그 나이 때의 나와 엇비슷했다. 그 시절 내게 필요했던 선생을 과장하다 보면 기 빨렸다. 오후부터는 목구멍에 프로폴리스를 뿌리기 시작했다.
주중에도 수업이 있지만 퇴근 정서에는 노동 피로가 함의 되어야 했기에 퇴근이라기보다는 귀가였다. 수업 한 두 개야 외출이 귀찮은 거지, 노닥대는 거였다. 토요일 귀가는 퇴근에 부합했지만 다음 날 또 노동이 있는 한 퇴근이 아니었다. 책임감을 감싼 긴장감이 풀리지 않았다. 일요일은 끝나지 않은 긴 토요일이었다. 일요일 밤, 다음 날 아무 일정이 없어서 무방비해져도 괜찮아지는 해방감이 가로등처럼 가지런히 늘어선 마음 길을 관통하는 중이었다. 내 가로등은 희끄무레했다.
퇴근길, 한 때 온전히 갖고 싶은 단어였다. 3개월 가량 퇴근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출근할 수 없었다.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여기저기 전단지도 붙여보고, 아파트 게시판 광고도 해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입시논술은 성수기와 비수기가 극명해 월 100만 원도 못 버는 춘궁기를 분기 단위로 겪던 때도 귀가길만 듬성듬성했다. 하릴 없이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재래시장 인근 대폿집 ‘퇴근길’ 앞에서 먹먹한 적 있었다. 술을 못했지만 퇴근길 술 한 잔이 그리웠다.
퇴근길에는 보상 심리가 작동했다. 맛있는 밤참에 집착했다. 그 시절에게 보내는 위로이자 일주일을 무사히 살아낸 축하였다. 한때는 [무한도전]을 보며 치킨을 뜯었지만 요즘은 식당에서 먹었다. 스마트폰을 보며 뭘 먹는 풍경은 맛대가리 없지만, 유리 벽면을 등지고 앉으면 나를 목격할 일 없었다. 이 순간을 위해 저녁을 부실하게 먹었기에 시장이 반찬이었고, 해방감은 MSG였다.
이슬람 음식점에 갔다. 집 근처에 이슬람 사내들이 우글대는 곳이 아니라 중년의 이슬람 아주머니가 한국말을 능숙하게 하는 데다. 오후 9시 30분 조금 안 된 시간, 손님은 나뿐이었다. 라그만을 주문했다. 풍채가 크신 아주머니는 히잡을 쓴 지인과 우즈벡어로 수다를 떠셨고, TV에서는 [응답하라 1988] 로맨스 모음이 방영 중이었다. 시끄럽지 않았다. [응답하라 1988]은 내가 아는 한 로맨스를 자극 없이 가장 따뜻하게 풀어낸 드라마였다. 몰랑몰랑한 온기와 퇴근길을 동행하기로 하고 스마트폰을 놓았다.
음식이 나왔을 때, 사장 아주머니는 수다 삼매경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게셨다. 내가 라그만을 가져 와 먹었다. 나중에서야 아셨는지 당근샐러드를 서비스로 주셨다. [응답하라 2023]의 한 꼭지로 넣어야 할 순간이었다. 그냥 넘어가도 되는 일을 미안해할 줄 아는 섬세함이 따뜻했다. ‘자 이제 그 차가운 눈물을 닦고’의 기분으로, 차가운 눈물을 흘렸던 것을 자각하며, 한 주가 돌파되었다. 떠나간 마음보단 따듯했고, 거친 인생 속에, 퇴근할 수 있어서, 다음 출근이 있어서, 감사했다. 그리고,
빈 방이 나를 맞았다. 이 시꺼먼 방구석에서만 내 젊을 보내기엔 너무 아깝다. 한 주 내내 학생들에게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라고 말했지만 정작 나는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맸다. 퇴근할수록 조금 더 저렴해지는, 이제 그런 넋두리는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