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여자랑 가고 싶었어요
사는(buy) 사람만 유효한 이곳에서, 사는(live) 사람은 무엇일까? 예쁘려면 다 예쁘든가. 예쁨의 틈새에 치워지지 못한 그림자 속에도 사람이 있었다. 본래 이 땅의 주인이었을 그들이 이물질처럼 끼어 있는 사태를 황리단길이라 불렀다.
경주는 내게 가장 가까운 관광지였다. 시내버스 정류장에 시외버스 기착지가 있었다. 대구로 출근하는 시간과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는 시간은 엇비슷했다. 경주는 오히려 출발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계산이 섰다. 마지막 방문은 ‘황리단길’이 만들어지기 전이었으니 최소 6년 전이다.
유물은 고리타분했다. 내 조부를 보면 나는 농민의 후손이 확실하고, 유물은 왕과 귀족의 사치품이었다. 피착취인 후손이 주인님의 영광에 자부심을 가지는 행태를 민족의식이라 부를 필요는 인정하지만, 개그다. 아니, 계급의식을 떠나 옛것은 이런들 어떠하지도, 저런들 어떠하지도 않았다. 나는 내 만수산 드렁칡 생태 보존이 중요했다.
우리 동네 스타벅스 개점 시간 9시, 경주 터미널 스타벅스 개점 시간 7시, 경주 첫 차 7시 5분. 8시 조금 넘은 시간이면 스타벅스에 앉을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편의점 커피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운 화요일 아침보다 사치스러운 아침을 맞을 수 있는 반전도 구미가 당겼다. 가슬가슬한 비는 끝물이었다. 오전에 갠다는 예보가 틀리더라도 스타벅스에 틀어 박혀 있다가 허무하게 되돌아오면 허무한 맛이라도 쓸 수 있으니 일단 움직였다.
사는 게 참 힘든가 보았다. 오전 7시 5분에 도로가 막혔다. 진량 공단 빠져 나가는 시간이 10시 5분 차로 포항 갈 때보다 지체되었다. 오전 7시 15분의 도로 위에서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기 위해 피로에 맞서는 사태가 각자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 이름이 숙성되어야 밥이 되고, 밥은 제대로 발효(醱酵)되어야 삶이 발효(發效)될 것이다. 쉬어빠진 땀 냄새를 준비하는 시간, 시내버스 에어컨 냄새는 오늘도 퀴퀴했다. 꾸역꾸역 뜸 들여야 겨우 남기는 ‘고작’들이 바글대는 도로 위에서 나는 [1Q84]를 읽었다.
대학 3학년 2학기 때, ‘영어 빡세게 공부하자!’며 교양 4과목을 영어로 채웠다가 무라카미 하루키만 읽었다. [상실의 시대]를 시작으로 국내에 발간된 그의 모든 책을 샀다. 성적은 사요나라, 나는 하루키 나라, 서른 살은 남의 나라. 하루키를 두고 영어 따위로 시간 낭비해야 하다니, 청춘이란 슬픈 천명이었다. 인생에서 ‘자살’에 가장 깊이 매료되어 있을 때였다. 하루키는 내게 구원인지 도피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1Q84] 1권은 2011년 12월 3일~4일에 읽었다. 발간 즉시 샀지만 밥 벌어 먹느라 읽지 못했다. 2011년 12월은 처음 치르는 대입 논술 파이널 직후 육체적, 정신적 탈진 상태였다. 학생들보다 크게 나을 것 없는 첨삭 강사 시절, 모든 게 벅찼다. 수능 직후 열흘 가량, 오전 8시 출근 오후 10시 퇴근했다. 점심, 저녁 식사 시간은 총합 30분 안팎이었다. 퇴근해서는 다음 날 과제를 예습해야 했다. 사람이 말로 기진할 수 있음을 뼛속으로 새겼다. 끝나자마자 내년에도 이 짓을 해야 함이 암담했다. 이를 수습하고, 정신이 들었을 때 내게 주는 보상으로 하루키는 적절했다.
“오빠는 1Q84에 나오는 덴고 같아.”
이 책에 대해서라면, 아는 여자 사람의 말만 기억났다. 덴고는 수학 강사였고, 당시 나는 학원에서 일하기 전이었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하루키 소설 속 인물 같다는 말은 듣기 좋았다. 덴고에게서 술, 음악, 요리, 운동, 여자, 그러니까 삶을 윤기 나게 만들어줄 요소와 최종심까지 오르는 글쓰기 능력을 빼면 나였다. 세계에서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거리감과 그에 대한 무심함.
경주 터미널 스타벅스는 우리 동네보다 어두웠지만, 창가는 자연광 덕분에 작업할 정도는 되었다. 비가 왔으므로 노트북은 챙겨오지 않았다. 무게를 줄이느라 텀블러도 챙겨오지 않았다. 터미널 방향 2층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 화요일보다 3배는 더 비싼 아침을 먹고 작업을 시작했다. 인쇄해 간 영일대, 도서관, 지하철, 폐가를 수정했고, 2023년 중앙대학교 입시 논술 기출 문제를 풀었다. 중앙대 시험은 학생이 생각해야 하는 논술이라기보다는 답을 문장으로 쓰는 서술형 문제였다. 제시문만 많고, 문제 간 연계도 안 되어서 가장 싫어했다. 일을 마무리하고, 책을 좀 읽다가 자리를 떴다.
목적지는 첨성대였다. 첨성대는 경주의 상징이었다. 금관, 다보탑, 석가탑, 석굴암은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가 한국 어딘가, 중국이나 일본 어딘가에도 있었지만 내가 아는 한 첨성대 비슷한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도보 30여 분 거리의 효율이 좋았다.
가는 길에 황리단길을 거쳤다. 말로만 듣던 유명인을 만난 것 같아 반가웠으나 한 주 더 일찍 왔어야 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별 수 없더라도 시험을 마친 대학생들은 지나치게 부지런했다. 바글대도 좋은 건 고요뿐이다. 외부로 노래를 틀어대는 몇 몇 상점도 한옥 거리 분위기를 깼다.
황리단길의 가치는 고분을 풍경으로 한 한옥으로 일관된 ‘거리’에서 오는 것이지 개별 ‘건물’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길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이 아니라 길의 배경으로 건물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군집이 개별 가치를 만들어 내는 줄도 모르고, 클럽에서나 틀 것 같은 소음을 이 거리에 풀어두는 것은 멍청하고, 무례했다. 기왕 인위적으로 조성된 거리라면 시에서 나서서 간판이나 외부 구조물까지 경직될 정도로 규제했으면 싶었다. 이곳을 먹여 살리는 것은 ‘길’ 그 자체니까.
물론, 내 취향은 아니다. 뾰족한 반골 정서는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대상을 싫어할 수 있었다. ‘인스타 감성 카페’로 대표되는 자본으로 포장된 예쁨은 허영으로 낙인찍고 내 세계에서 폐기했다. 내 관점에서 황리단길은 자본으로 구축된 예쁜 폐허였다. 사는(buy) 사람이 신나느라 살던 사람이 추방된 탐식의 공간에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길 가다가 아무 식당에 들어가 아무 거나 먹으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황리단길에는 토박이들이 드나들 만한 식당이 없었다. 관광지 프리미엄은 내 이해 범위를 벗어났다. 내게 필요 없는 반짝거림 비용이 청구되는 불합리를 수용할 생각은 없었다. 빛과 빛 사이에서 끼어있던 투박한 분식집이 반가웠지만 폐점되어 있었다. 기약 없이 걷다가 낡은 건물의 도넛 콩국 집을 발견했다. 황리단길 이전부터 있었던 듯, 리모델링하지 않은 전통 안쪽은 허름하되 손님이 가득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오래된 가게였다. 콩국은 맛있었지만, 끼니로 채울 만한 음식은 아니었다. 뭔가를 더 먹을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는 셈 치니 괜찮았다.
첨성대 옆 벤치에서 책을 읽었다. 내가 정주하며 책을 읽는 동안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지나갔다. 짧은 순간의 이방인들은 끊임없이 잇대져 소란했다. 스피커에서는 음악도 흘려보냈다. 국악은 경주의 풍경으로 들렸지만, 대중가요는 소음이었다. 낮게 욕설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경주월성 쪽에 사람이 없었다. 토박이들은 나보다 억울할 듯했다.
월성 언덕에서 해자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독서를 이어갔다. 첨성대 부근에서 바글대는 소란들은 공기 중에서 다듬어져 물소리에 섞였다. 내 뒤를 장악한 새소리를 넘지 못하는 먼 곳의 소리는 좋은 ASMR이었다. 소변이 마렵지 않았다면 더 있었을 텐데, 3시가 조금 넘었을 때 내려왔다.
계림에 화장실이 있겠거니, 어, 없네, 교촌마을에 화장실이 있겠거니, 어, 여기가 어디지 끝에, 입구에서 화장실을 발견했다. 교촌마을에 교촌치킨이 없는 걸 의아해 하며 식당을 찾아 다녔다. 치킨 값 상승 주범이 이곳에 들지 못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황리단길이 20대를 위한 공간이라면 교촌마을은 30대 이상에게 적합할 듯했다. 고급과 고요에 부여된 식사 단가가 그랬다. 경주는 조상의 흔적을 파는 곳인데, 가격은 다들 엄마 없는 호래자식들이었다. 내가 타협할 수 있는 곳은 폐점되었거나 휴일이었다.
황리단길과 교촌마을에서 본 것은 토박이를 기억하지 않는 거대한 시치미 떼기였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화려하게 전시한 거리 사이에도 폐가가 된 이웃집을 낀 가정집에 길고양이가 옹기종기 모였고, 벌판에 홀로 선 낡은 주택이 알 박기의 오명과 맞섰고, 낡은 컨테이너 경로당에 남자 노인들이 한담 중이었다. 당신들과 상관없는 것들로 규정된 세계 속에서 당신들은 당신들을 어떻게 확인할까?
“소설을 쓸 때, 나는 언어를 사용하여 내 주위의 풍경을 내게 보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치환해나가. 즉 재구성을 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나라는 인간이 이 세계에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 [1Q84] 1권 104쪽
경주는 신라의 여음과 자본의 식민지 사이의 어딘가였다. 신라가 자본으로 재구성될 때, 자본으로 설명되지 않는 피식민지인들은 기각되는 중이었다. 관광객보다 몸빼 입은 할머니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태가 꼬부랑꼬부랑 사멸해 간다. 시간은 자본 편이다. 자본은 대머리독수처럼 먹이가 죽어가길 기다린다. 대자본이 살아 숨 쉬는 21세기 야생의 법칙이다. 기록되지 않고, 사진으로 남길 만하지 않는 그늘 부스러기를 찾는 피식민지 유물 여행, 아무튼 유물이라니, 과연 경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