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2시간 16분 타고 가서 영화 한 편 보고 온 날

열정 같은 소리를 해볼까 합니다

by 하루오

“꼬우면 대전으로 와라. 대가리 박살내 줄 테니까.”

대전 사람들은 위풍당당했을 것이다. 한화 이글스는 2023년 6월 21일부터 7월 9일까지 8연승 포함 최근 11승 3패했다. 그래서 나는 대전에 감에도 불구하고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챙길 수 없었다. 아쉬웠으나 전화위복이었다. 전투력이라고 해도 좋았고, 열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슬램덩크 인생특강』 덕분에 7월 10일 오후 3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 메가박스 대전중앙점을 나서는 나는 세상을 다 때려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앙로를 관통하며『더 퍼스트 슬램덩크』O.S.T. 10-Feet의 「제zero감」을 반복해서 들었다.


아이쿠, 하마터면 최선을 다할 뻔했네, 는 내가 좋아하는 농담이었다. 나는 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회원이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왜냐면 스트레스 받기 때문이다. 인생의 재미와 스트레스를 등가교환하고서도 불면을 앓는데, 최선까지 더하면 내 몸은 답이 없어진다. 유유자적은 생활양식이자 생존양식인 셈이다. 내 능력의 70%만 쓰면서 사는 것, 좌우명이라고 하면 최선의 냄새가 나니, 지향성 정도로 해두자. 이런 내게 자신의 성공을 기반으로 ‘열정’과 ‘긍정’을 외치는 자기 계발서는 그야말로 대가리 박살낼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열정이 만드는 무한의 긍정 에너지 – 빨간색으로 강조된 소제목을 조소했다. 열정 가득한 삶은 존중하나 책으로 낼만 한 호들갑은 아니다. 너의 사실이 나의 사실일 수 없다. 사실이 아닌 것이 책이 되는 것은 내게 심각한 문제였다. 책은 내 꿈으로서 신성성의 권위이므로 거짓이 책이 된 것을 보면 오물을 뒤집어쓰고도 한 마디 할 수 없는 종류의 모멸감이 들었다. 『슬램덩크 인생특강』은 이번 기획이 아니었다면 손도 대지 않을 허섭스레기였다.


KakaoTalk_20230716_220421497_05.jpg


1월 4일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7월에도 상영 중인 것을 알고, 정말이지 포기를 모르는 영화군, 했다. 정대만의 마음으로 바쁘다며 미뤘던 3회차 관람을 결심했다. 상영 중인 극장은 전국에 몇 안 되었다. 대구/경산에는 없었다. 잘 됐다 싶었다. 타지역에 가서 영화 한 편 보고 오는 낭만적 낭비는 글감이 될 법했다. 이 일이 열정으로 정리되기는 거부했다. 그저 단조롭게 행해지는 책 나들이의 일환이었다. 70%의 능력으로 살려면 무미건조하게라도 성실해야 했다.


막상 움직이려니 귀찮아 뭉그적대다가 7월 10일 메가박스 대전중앙로점을 예매했다. 부산 사상점이 이동 시간은 짧았지만, 사상은 구포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움직여야 해서 번거로웠다. 책 읽는 한, 기차 시간 30분 안팎 차이는 문제되지 않았다. 대전중앙로점은 대전역에서 도보 1km가 안 되었다. 마침 월, 화 문화의 날 행사 중이라 영화는 7,000원에 예매했고, 수 년 만에 접속한 코레일 톡에는 적립금 4,300원이 있어 예상 밖의 비용절감까지, 시작이 좋았다.


처음에 생각했던 책은 『슬램덩크』 그 자체였다. 풍전전을 끝내고 산왕전을 준비하는 데까지 읽고 극장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영화는 송태섭 어린 시절 짤막한 일화 이후, 베이스 둥둥대는 OST와 함께 등장인물들이 펜 선으로 한 명, 한 명 그려지며 저벅저벅 걸어온다. 책에서 튀어나온 친구들을 그렇게 만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소장한 책은 없었고, 소장했다 하더라도 소장용 책을 들고 이동하지 않을 것이었고, 도서 대여점도 없었다. 도서관에서 ‘슬램덩크’를 검색했다. 책 두 권 모두 자기 계발서였다. 기차 왕복, 극장과 기차 대기 시간에 읽어야 하니 보다 분량이 많은 쪽을 선택했다.


책은 예상만큼 자기 흥분을 주체 못한 채 느낌표 가득한 열정을 쏟아냈다. 22명의 글쓴이들이 쓴 것 중, 책으로 엮여도 될 만한 것은 손에 꼽았다. ‘아프니까 청춘’은 말은 개똥같아도 글이었다. 그러나 블로그나 커뮤니티에서 좋아요 몇 개 받으면 적당한 수다들이 책으로 묶인 사태는 참담했다. 각오했던 모멸감을 기차 여행의 설렘으로 상쇄하더라도 재수 없는 건 재수 없었다. 열정과 냉소 사이에도 열량 보존의 법칙이 유효해서 무난히 읽어 나가면서도 열정의 작용에 반작용으로 냉소에 날이 섰다.


모든 ‘나’들은 개별언어로 구축된 서사체(體)였다. 『슬램덩크』는 나의 개별언어였다. 한국인은 한국어라는 일반언어로 소통하지만, 이름을 가진 개체들은 개별언어로 소통한다. 내 주변에 슬램덩크 화자가 없어 나는 서사의 한 축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 나는 소수 언어 화자로서 사람들을 만날 때 외국어만 듣느라 쓸쓸했다. 그런데 완벽하게 내 자아의 모국어를 구사하는 신자 간증이라니, 모순에 모순이 거듭되었다. 굉장히 짜증스러운데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맞을 제단이 차곡차곡 쌓였다.


기차에서 다 못 읽은 것은 스타벅스 은행동 지점 2층 구석에서 마무리했다. 후반부는 대충 훑었다. 『슬램덩크』 내 인물/상황 간 가상 비교에 쓸데없이 진지했다. 커뮤니티에 올렸다면 꽤 많은 ‘좋아요’를 받으며 논쟁거리가 될 듯했지만 책에 담을 무게는 아니었다. 하긴 그 뻔뻔한 무모함이야말로 특강할 만한 인생의 실존 양식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퉤, 침을 뱉는 기분으로 책을 덮고, 오전 11시 40분, 이 글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초고에서 살아남은 문장은 몇 개 안 되었다. 문단 구성과 방향성 자체가 틀어졌다. 이 책은 영화의 불쏘시개가 아니라 기름이었다.


KakaoTalk_20230717_095931020_07.jpg 충청 방언을 기대했으나 말투가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방언의 사멸을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12시 30분쯤 스타벅스를 나왔다. 그 동네는 대구 동성로쯤 되는 상업 지구인 모양이었다. 둘은 판박이였으나 특정 가게가 아니라 길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음악을 크게 틀고 있어서 대전이 훨씬 시끄러웠다. 개인적으로 이어폰을 낀다고 해도 울림으로 존재감을 알릴 정도로 요란했다. 거짓 활기가 공간을 싸구려로 만들었다. 나야 다시 안 오면 그뿐이지만, 머물며 장사해야 하는 사람들의 청력은 안녕할지 의문이었다.


점심으로, 멘보샤로 전국제패 한다는 ‘태화장’과 천하제일빵집 ‘성심당’은 피했다. 나도 최강은 꺾되 전국제패에 실패한 ‘북산엔딩’ 하고자 했다. 성심당 그늘 아래 빵집이 있을까 싶어 검색해 보니, 몇 개 있었다. 난관을 돌파하는 무모함과 용기, 혹은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무지와 전략 사이에서 정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낭만닥터 김사부3』 종영 후 시즌1, 2를 정주행 한 직후라 ‘김사부빵공장’부터 찾아갔다. 젠장 할, 없었다. 별 수 없이 성심당인가, 하다가 크로칸슈 집을 발견했다. ‘인스타, 인스타’ 이름과 외형이 반(反)국밥적이었으나 북산도 멤버들은 화려했으므로 기본세트를 샀다. 한 개는 맛으로 먹되, 세 개는 느끼했다. 혹시 몰라 설사를 비우고 극장 내 자리에 앉았다.


KakaoTalk_20230717_095931020_06.jpg
KakaoTalk_20230717_095931020_05.jpg
[사오] 한 개만 먹었어야 했습니다.


봤노라, 쩔었노라, 지렸노라.


KakaoTalk_20230717_095931020_04.jpg 슬램덩크로 수업하려고 틈틈이 메모했습니다. OTT로 나오면 대사 정확하게 따서 수업 구성할 예정입니다.


아래 말고, 가슴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강독(講讀) 강독(强讀)법이라도 제정하고 싶었다. 성장기 10대는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 세운 벽을 울타리 삼아 우물 안에 안주하고 있는 못난 어른들도 봐야 했다. 세 번째 보는 건데도, 아니, 세 번째 보는 거라서 더, 아니, 『슬램덩크 인생특강』덕분에 더, ‘벽’과 ‘돌파’가 실감났다. 송태섭이 자신보다 큰 사람들을 드리블로 돌파할 때, 「제zero로」의 후크 부분에 맞춰 『슬램덩크 인생특강』의 22개 인생들이 핵융합 하듯 폭발했다. 과연 ‘남조선 폭약 집단(韓火)’의 도시였다. 닥치고 열정이 합리성을 깨부수고 독수리처럼 날아올랐다.


초사이어인과 플레시맨이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처럼 무모해보고 싶었다. 당시는 나이가 공짜가 아니었다. 동네 동생들보다 더 높은 계단이나 담벼락에서 뛰어내려야 했고, 동네 형이 기록한 높이를 계승해야 했다. 뛰어내린 높이가 용기의 크기로서 나이였다. 높이가 두려워도, 심장이 쿵쾅거려도, 힘껏 괜찮은 척했다. 매년 내 방문 기둥에 엄마와 나와 둘이서 내 키를 체크하지 않게 된 그 무렵부터, 나는 나이 대신 연식으로 기록되는 로봇이 된 듯했다. 로봇의 합리성이라면 경기 전부터 산왕전을 패배로 단정하며 계산으로 직조된 확실한 평화를 유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방 한구석에 앉아 쉽게 얘기해 한다. 더럽게 칙칙한 환상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이가 무상으로 제공되었다. 로봇을 닮아갈 때도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어려워지는 수학 문제로 나이의 의례를 실천했다. 아무튼 성적은 내야 했고, 좋든 싫든 관동별곡, 3차 함수, to부정사, 판데르발스 힘을 돌파해야 했다. 그 나이에는 나름 그 나이의 끝판왕들이 있었고,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싸웠다. 대체로 승리했지만 지친 나는, ‘열정 같은 소리 앉았네.’ 하는 어른이 되고 말했다.


냉소는 못난 자기 방어기제일 뿐이다. 냉소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자기합리화로 깊게 판 우물에서 고고해 봤자 무덤 안 곡이다. 안전하게 나이 드는 시체를 생각했다. 시체의 의례는 없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송태섭이 죽은 형을 떠나보내는 의례였고, 내 대전행은 내 죽은 열정을 떠나보는 의례의 전조였다. ‘죽더라도 일어서다 죽자.’를 좌우명 삼던 시절도 있었다. ‘No.1’이 내가 아닌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것들은 죽어 냉소가 되었다. 정대만처럼 과거를 미화한 열등감 덩어리, 하지만 서태웅은 벽 앞에서 웃었다. 아…… 간지. 영화를 보는 동안 『슬램덩크 인생특강』은 내 열등감을 구체적으로 저격했고, 나는 부끄러웠다. 양산을 쓰고「제zero로」를 들으며 중앙로를 가로지르며 세상을 다 때려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부끄러움을 도포했다.


중앙시장에서 칼국수를 먹고 시장을 관통해 대전역으로 왔다. 시장은 부산 국제시장이나 대구 서문시장과 다를 바 없었고, 목천교 아래는 우리 동네 금호강변과 다를 바 없었고, 더웠다. 그곳이 대전이라는 증거는 기차 역 앞 꿈돌이뿐이었다. 93년 대전엑스포, 30년 만의 방문은 엑스포 광장과의 재회도 없이 마무리되었다. 당시 내가 30년 후가 그릴 수 없듯, 지금 나는 30년 후가 그려지지 않았다.


KakaoTalk_20230717_095931020.jpg
KakaoTalk_20230717_095931020_01.jpg
허름한 데가 좋아요.


기차 시간은 1시간 30분가량 남아 있었다. 『1Q84』 2권을 읽으며 다시 내 일상감에 접속했다. 20Q3년, 난 누구며, 난 또 어디에 있을까? 늙은 덴고는 93년에 놓아둔 그것을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을 예감했다. 그러나 돌파, 자꾸 이 단어가 자포자기의 평화를 긁어댄다.


KakaoTalk_20230716_220421497_01.jpg


- 사람들은 아무리 먼 길을 돌고 돌아도 좋아하는 일을 하게 돼 있다. 『슬램덩크 인생특강』p.153



집에 와서 샤워 후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었다. 배경음악은 「제zero감」이어도 좋았다.

이전 06화어둠의 유물 찾기, 경주 황리단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