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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Mar 02. 2021

우정의 무대 - 엄마 이데아


반드시 눈물이 나는 노래가 있다. [우정의 무대] 코너 중 하나의 배경음악이었다. ‘엄마가 보고 플 때, 엄마 사-진 꺼내 놓고, 엄마 얼굴 보고 나면 눈물이 납니다.’를 박자에 맞춰 느리게 소리 내 따라 부르다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한 순간, 엄마는 더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먹먹하다. 엄마의 입가에 합죽이 같은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엄마는 내 안에 눈물을 적립 중이다.


특별한 사연이 없는 한, 엄마는 보편적 눈물 버튼이다. 우리는 엄마의 생(生)을 파먹고 자랐다. 아비 노릇 못하는 아빠보다 어미 노릇 못하는 엄마가 드문 편이다. 엄마가 보다 보편적이어서 ‘Oh my god.’과 ‘엄마야.’는 닮았다. 나는 영자 씨를 통해 엄마의 보편성을 개별적으로 체험했다. 나는 나의 영자 씨 이외의 엄마를 상상할 수 없다. 엄마는 가부장의 권위에 기댄 못난 수컷을 버티며 나를 키웠다.


"우리집 행복하나?"

초등학교 4학년 때, 함께 TV를 보던 중에 엄마가 뜬금없이 물으셨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너무 당연해서 대수롭지 않았다. 엄마는 그러면 됐다고 했다.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내가 모르는 마음 자리에서 고군분투한 엄마는 10여 년 후, 수축기 혈압이 200을 넘겼다. 그날 엄마가 TV에서 보고 있던 것을, 그 당시 엄마보다 나이가 많아진 나는 허공 속에서 더듬어 보지만 알 수 없다. 나는 아마 영원히 엄마가 보던 소실점에 닿지 못할 것이다.


당구장에 짜장면, 만화방에 라면, 학교 앞에 떡볶이, 소풍에 김밥이 있다면, 군대에는 엄마가 있다. 아마 군대는 남자에게 가장 신이 필요한 순간이고,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엄마를 빚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과 사랑을 인격화 한다면 엄마다. 위협적인 환경에서 ‘나’라는 개인이 군인의 보편성에 수렴해 가며 두려움과 외로움에 질린 내게 엄마는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구원이다.


저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 군인들의 버라이어티 쇼에서 이 외침만 기억에 남았다. 군인들은 누군가의 어머니 목소리를 듣고 우르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올라온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엄마에게 달려가는 행위로서 그리움을 달랬을 것이다. 언젠가 군인이 될 나와 언젠가 군인의 어미가 될 엄마는 우정의 무대를 보며 함께 울곤 했다.


“우리 성아는 언제 커서 저런데 나가겠노? 니는 엄마 목소리 들으면 알겠나?”

“알지. 와 모르노? 저 사람들이 이상한 거다.”
 엄마는 나의 확신을 흡족해하셨다. 사실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엄마가 기뻐하는 게 좋기도 했고, 확신해야만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다. 왜냐면 엄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군인이 되어 무대 위에서 엄마를 부둥켜안는 상상을 하면 피부 아래가 간질간질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의 승자는 대체로 엄마다. 이기지 못한 엄마가 문제 있거나 이긴 아빠가 대단한 것일 뿐, 이 게임은 애초에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진다. 엄마 뱃속에서 엄마 몸을 소리로 듣고 커서, 엄마 젖을 먹고 자란 자식이 엄마와 유대가 더 쉽게 쌓이기 마련이다. 엄마 품 속 촉감과 냄새의 기억을 잊어도 포근하고 따뜻한 감정은 남는다.


‘엄마’는 인간이 내는 최초의 소리이자 의미가 되는 숨결이다. 숨을 뱉는 상태에서 입술을 때면 ‘엄마’가 되고, 입술을 때며 숨을 뱉다가 입술을 닫으면 ‘mom’이 된다. 중국의 ‘妈妈’, 베트남의 ‘mẹ’, 인도의 ‘मैया’, 프랑스의 ‘maman’, 스페인의 ‘mamá’도 ‘[ma]’ 근처에 있다. ‘ㅃ’ 같은 된소리나 ‘ㅍ’ 같은 거센소리는 입술에 힘이 더 들어가서야 나와서 아빠다. 엄마가 숨이 오가는 길목에 있는 첫 번째 의미인 것이다. 그 의미를 본능적으로 아셨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나이도 있으니 ‘어머니’라고 부르려고 하니 엄마는 하지 말라셨다. 어색하고 정 없이 들린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생물학


엄마가 늙기 시작한 것은 내가 훈련소를 나온 직후부터였다. 우정의 무대는 없어졌지만, 우정의 무대가 있다고 해도 나는 나갈 수 없었다. 눈이 나빠 공익 판정을 받았다. 겨우 4주 훈련 받을 뿐인데, 입소 일이 다가올수록 엄마는 안절부절 못하셨다. 지금이야 비만에 접어들었지만 그때는 비쩍 말라 살을 찌우려고 한약을 먹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다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셨고, 나는 행군에서 발뒤꿈치가 조금 까진 것을 제외하면 멀쩡하게 훈련을 마쳤다.


어렸을 때, 엄마는 엄하셨다. 빗자루, 효자손, 먼지떨이 가리지 않으셨고, 나는 멍이 들도록 남부럽지 않게 맞고 컸다. 엄마는 화내기와 혼내기의 경계를 구분할 줄 아셨고, 내가 울고 불며 맞는 와중에도 그것이 사랑의 매라는 것을 알게끔 현명하게 처신하셨다. 매를 피하다 보니 딱히 반찬투정을 한 기억은 없는데, 갈치 못 발라 먹는다고 머리를 쥐어 박힌 기억은 있다. 할매는 다 해주는데 엄마는 왜 안 해주노. 그라면 할매한테 가서 살든가! 소리를 꽥 지르던 엄마가, 할머니가 되기까지는 10년쯤 걸렸다. 훈련소에서 나온 그날, 엄마도 갈치 살을 발라주셨다.


집을 떠나 자취를 하면서도 엄마가 발라준 갈치 살은 유효했다. ‘집’에서 엄마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음식 때문일 것이다. 집에 거주하는 동안의 시간은 끼니와 끼니를 매개로 이어지며 각자의 방들을 하나의 냄새로 묶는다. 엄마의 손끝에서 출발한 시간은 하나의 음식에 배었다가 각자의 뱃속으로 분배되어 살로 차오른다. 모든 자취생들은 끼니마다 엄마의 시간을 기억한다. 닥쳐오는 살의 성분이 다르다. 그래서 엄마는 집의 향수(鄕愁)이자 향수(香水)이다. 엄마는 밑반찬을 택배로 부쳐주셔서 내 살은 여전히 엄마의 손끝 성분을 함유한다.


엄마는 아직도 꿈속에서 내가 예닐곱 살로 나온다고 하신다. 예전에는 병치레가 잦았던 탓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죄책감이 아닐까도 싶다. 내가 예닐곱 살이던 어느 밤, 엄마는 내게 엄마 없이도 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옆에서 아빠는 이기죽거렸다. 나는 아빠를 거스르면 안 될 것 같아 살 수 있다고 대답했다. 엄마는 몇 차례 더 물었고, 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이모 집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갔다. 엄마가 나간 후 잠자리에 들었다. 아빠는 날이 밝으면 할머니 집에 가자고 했다. 미묘한 불안으로 눈물샘이 아렸다. 울면, 아빠는 때렸기에 울음을 참았다. 잠이 안 와 뒤척이는데 엄마가 돌아와 나를 꼭 안아줬다. 철이 들고서야 그날 엄마는 ‘영자 씨’를 버리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엄마는 나의 엄마로만 살았다. 그리고 문득 늙어 버리셨다.


[바람의 검심]에서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남은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의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했다. 한 개인은 타인의 눈물로 연대된 주식회사이고, 나는 엄마의 대주주고, 엄마는 나의 대주주다. 누가 죽든 한 쪽의 가치는 폭락한다. 그걸 확인할 날은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란다. - 어머니, 내 어머니. 사랑하는 내 어머니. 보고도 싶고요. 울고도 싶어요. 그리운 내 어머니. - 이미 이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 못하는데, 그 이후는 감당할 자신 없다.


효(孝)는 내가 받은 부양 의무를 상환하는 정의(正意)다. 경제적 부분은 어떻게든 상환할 자신 있지만 정서적 부분은 부채가 늘 것 같다. 내리 사랑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발생하는 필연적 불의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환 방법은 하나뿐이다. 다음 생에는 영자 씨, 당신이 내 딸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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