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어버린 못난이의 고백)
나는 유명인의 몰락이 흡족하다. 그들의 불행 덕분에 내가 세계의 평균에 조금 가까워진다. TV에서 본 그들의 집은 내가 지금부터 버는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평생 모아도 살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뭔가가 힘들다고 징징대는 걸 보면 조롱받는 기분이다. 그들이 내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공연은 그들의 불행이다. 나는 유명인들의 파국을 바란다. 내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정의다.
당신들에게도 자백을 요청하고 싶다. 이런 인간은 나 혼자만이 아니어야 내가 도덕의 평균에 조금 가까워진다. 인간은 모순된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나만큼 노골적이지 않을 뿐, 당신들의 측은지심 뒷면에 나와 같은 치졸함이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그 부끄러움을 모른 척 방치하다가는 나처럼 된다. 나는 이 혐오스런 괴물에게 먹이를 준 적 없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는 이제 내게 역사나 판타지에 가깝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누구나 이 책을 읽었다. 완독한 학생은 적을지 몰라도 교과서와 담 쌓은 날라리들도 이 책을 부분적으로 읽었다. 왠지 각 교실에 한두 권씩은 돌아다녔고, 야자 때 공부하기 싫거나 놀 거리가 없으면 이 책이라도 읽었다. [좋은 생각]도 매달 누군가가 사서, 교실 전체가 공유했다. 00년대에는 [느낌표], [러브 하우스], [TV동화 행복한 세상]처럼 마음을 데워주는 콘텐츠가 흔했다.
이 책은 인류애가 느껴지는 에피소드들로 채워졌다. 읽은 지 20년도 넘어서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는 없지만, 이 책에서 느꼈던 모닥불 같은 온기는 기억한다. 그 온기는 겨울날, 몸 전체를 데워주지는 못하지만 손바닥과 얼굴을 그을린 온기로 시린 등을 참아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읽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고, 나도 착해지고 싶기도 했다. 영혼에도 배터리가 있다면, 이 책은 성능 좋은 충전기였다.
다들 읽었는데 누구도 이 책으로 토론은커녕 후일담도 나누지 않았다. 남고생인 탓도 있겠지만 어차피 느끼는 것이 똑같기에 굳이 말을 공유할 필요가 없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만 해도 나는 유명인들의 자살이 안타까웠고, 화려함 속에 감춰져 있었던 그들의 고통이 측은했다. 그런 10대가 나이 먹어 된 신입 중년은 이토록 삐딱하게 날 서 있다.
나이의 주요 성분은 실패였다. 나는 이런 내가 되고 싶은 적 없었다. 절대다수가 꿈 꾼 적 없는 삶을 살아가지만 마음은 어떻게든 타협을 봤다. 꿈에서 놓여난 인생, 새로운 꿈을 안고 살아가는 인생, 현실을 즐기는 인생 등 하위 호환되는 대체재는 다양했다. 그러나 나는 꿈을 너무 오래 꾸느라 현실에 늦게 발 디뎠다. 실패한 꿈은 현실에서 쉬어빠진 열등감이 되었다. 좋은 글을 읽으면 부러움과 열패감 사이에서 찌그러졌다.
내면은 찌그러지며 날을 세웠다. 나는 사람이 점점 싫어졌다. 사람은 스트레스다.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직함들의 역할극이다. 꿈은 배타적이어서 꿈과 무관하게 내가 맡은 역할은 대체로 내가 원하지 않은 것들이다. 나는 그저 돈을 벌어야 했다. 역할이 만나는 사람은 인격화된 돈이다. 돈이 사람 행세를 하는 기괴한 풍경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도 돈 뒤로 숨었다. 운 좋게 그래도 되는 밥벌이를 얻었다. 설을 제외하면, 사람과 밥 먹는 끼니는 1년에 스무 끼 안팎이었다. 사람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곳에서 악마가 살찔 줄은 몰랐다.
내게 인간성을 부여하는 것은 학생들이었다. mbti 검사를 해보면 평소에 intj가 나오다가 수업이 많아지면 infj가 나왔다. 가르치는 캐릭터는 이 문체와 달랐다. 나는 꽤 친절하고,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선생이다. 어린 조카들과 뒹구는 내 태도를 비추어볼 때, 학생들과 주고받는 교감은 순수했다. 이때는 유명인의 불행이 불편했다. 나이 먹으며 점점 보잘 것 없어져 가는 인간이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모라도 되어야 하는 듯했다.
잊고 있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지하철 역 입구 옆의 노파 때문이었다. 노파는 한 달에 한 번쯤 나타나 박스때기를 깔고 양말, 스타킹, 면봉, 때타올 등을 팔았다. 양말은 시가보다 500원에서 1,000원 정도 더 비쌌고, 면봉도 세 묶음 1,000원짜리를 두 묶음에 1,000원에 팔았다. 수업 몇 번이면 가판에 깔린 물건을 거의 다 살 수 있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노파를 볼 때마다 3,000원~5,000원어치의 물건을 샀다. 동정심도 있었지만, 5,000원의 효용 가치는 나보다 노파한테 있을 때 더 크다는 공리적 계산도 작동했다.
최근에는 못 본 척 지나쳤다. 쌓인 면봉과 양말이 많았다. 양말 디자인도 내 옷과 잘 맞지 않았다. 그러나 걸을수록 찜찜해져 20미터쯤 지나왔을 때 뒤돌아 봤다. 노파 주위는 텅 비어 있었고, 맞은편 편의점 앞에는 대학생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며칠 전 나타난 고양이 때문이었다. 고양이는 한 눈에 봐도 버려진지 얼마 안 된 혈통 있는 녀석이었다. 학생들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육포와 소시지를 사주었고, 고양이는 사람의 온기를 입 안의 달달함으로 누렸다.
왜 짐승이 사람에 선(先)하는 가. 노파는 고양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외모지상주의 노골적인 풍경에 반발감이 들었다. 나는 노파에게로 발을 돌려 필요 없는 이것저것을 10,000원어치 샀다. 집으로 오는 길에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편의점에서 따뜻한 베지밀이라도 사 드렸으면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마이너리그 에피소드 정도는 됨직 했다. 온기 비용이 11,000원이라면 나쁘지 않은 가성비였는데, 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는지 아쉬웠다. 하긴, 나는 온기가 아니라 화(火)기로 움직였다.
개인주의와 공리주의를 자신의 이기성을 정당화 하는 데 쓰는 요즘, 시대는 적정 온기가 그리운가 보다. 가난한 아이에게 공짜로 치킨을 대접한 치킨집 사장의 사연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그 치킨집에 배달앱으로 주문하고 치킨은 받지 않는 식으로 치킨집 사장을 돈쭐(돈+혼줄)내줬다. 치킨집 사장은 자신이 대접한 만큼 따뜻했을 것이고, 전국의 돈쭐낸 고객들은 자신이 치른 비용보다 더 따뜻했을 것이고, 이 사연을 접한 나는 공짜로 뭉근해졌다. 이런 에피소드들을 모아 매년 ‘마음을 열어주는 2021년 이야기’ 같은 것이 출판되면 좋겠다.
물론, 이 온기는 사회 약자를 향한 동정심에 가깝다. 그러므로 우리보다 신세 편한 사람들의 불행에 공감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사람을 향한 측은지심의 습관이라도 있어야 언젠가 측은지심이 위쪽으로도 번지게 될 것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측은지심을 전방위적으로 발산할 수 있을 때, 무너진 자존감도 복원될 것이다.
내 마음의 구성 성분은 타인이다. 아무도 없는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반도체 메모리일 뿐이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마음의 운동이자 마음의 확장이다. 마음에 담을 수 있는 타인의 크기가 128G, 256G, 512G…… 마음의 크기를 결정한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사람과 떨어져 마음의 근손실이 심각하다. 기가의 시대에 메가를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미음을 먹는 기분으로 이십 몇 년 만에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