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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Mar 09. 2021

러브 하우스 - 중년의 성적표

(feat. 나 홀로 집에)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집의 의미성분이 바뀌었다. 2000년 [러브하우스]에서는 house를 통해 home을 이야기했지만, 2021년 [구해줘 홈즈]에서는 home을 찾는다면서 house를 이야기했다. 하긴 1인 가구가 home이기는 힘들 것이다. 집은 사는(live) 곳이 아니라 사는(buy) 것에 더 가까워졌다. 강남불패는 아직도 불타는 진리다.


러브하우스는 허름한 집을 뜯어 고쳐줬다. 고친 집을 공개할 때면 배경음악으로 쓰였던 [미술관 옆 동물원] OST 「시놉시스」의 ‘따라따란 딴~ 따라다라라라~’는 우리가 새 방에 들어갈 때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었다. 러브하우스의 멜로디는 새 공간에 대한 파스텔 톤 기대로 뽀송뽀송했다. 그곳은 사람이 공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사람에 맞춰지면서 식구들 사이에 시들어 있는 ‘러브’에 물을 줬다. home이었다.


작가가 자극적으로 써줬거나 이 아이는 이미 home을 가진 상태라서 home의 귀함을 모르나 보지요.


내가 귀가할 때는 아무 멜로디도 들리지 않았다. 방 한 칸짜리 원룸에 home은 가당치 않았다. 나는 조선시대 노비도 가졌던 home 부재와 이 방을 house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 사이에서 거주했다. 책상과 행거가 차지한 공간을 빼면 남자 셋이 누우면 꼭 맞는 바닥이 남았다. 책상에서 화장실 입구까지 두 걸음, 부엌은 바로 옆이어서 싱크대 앞까지 여닫이문 열고 한 걸음이었다. 북유럽 교도소 독방이 내 방보다 크고 깔끔했다.


그렇게 조금 큰 관 속에서 11년째 거주 중이다. 올해 8월이면 그 방에서만 12년째로 접어든다. 작년에 세 번째 건물주를 맞았다. 월세 17만 원에 관리비도 없다. 2018년 폭염 때는 24시간 에어컨을 틀고 살아도 전기세는 5만 원을 넘지 않았다. 한겨울 가스비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사는 친구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이라며, 세탁기는 있느냐고 묻던데, 세탁기는 트롬이고 에어컨은 삼성이다. 장판이 울고, 벽지가 누래졌지만 층간소음이 적었다. 여름에는 개구리, 가을에는 풀벌레 소리가 그득할 만큼 한갓진 곳이었다. 층간소음 때문에 살인 충동에 시달리며 수면제를 타먹어 본 나로서는 최적의 주거지였다.


이런 집에 살고 있으므로 나는 사회적으로 실패한 중년이다. 30대의 명함이 차였다면, 40대의 명함은 집이다. 중년, 특히 남자들에게 경제력은 자존감과 직결되었고, 집은 자부심이었다. 현재 20대는 어떨지 몰라도 아날로그의 끝물 세대인 나는 ‘남자=경제력’ 문화권 사람이다. 여자 동기들이 ‘힐링’을 위해 해외에 다녀올 때, 남자들은 ‘돈을 모아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는 것이 당연했다. 모든 남녀를 일반화할 수 없겠지만, 남자의 마음이 달팽이를 더 닮은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집은 존재의 자격으로 격상되었다. 짊어질 집이 없는 민달팽이 중년은 초라했다. 인간은 누구나 가정을 꾸릴 권리가 있지만 집 없는 중년 남자는 자격이 없었다. 소득별 혼인 비율이 통계적으로 증명하는 사실이다. 십 몇 년 전 88만원 세대였던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중년이 되고 말았다. 이들 덕분에 국가는 청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정책을 만들었지만, 88만원 세대들은 이미 청년이 아니었다. 청년임대주택은 있어도 중년임대주택은 없다. 국가는 이 세대를 버렸다. 저출산 문제 해결에 기여할 가능성이 낮은 세대보다 청년들의 희망을 열어주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내가 월세 17만 원짜리 집에서 11년째 지내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밥값을 먼저 계산하려 들었다. 그들의 배려는 고마우면서도 낙오자에 대한 동정에 기반 한 호의라서 쑥스럽다. 가끔은 내가 전세 자금도 없을까봐 전세로 가는 건 어떠냐고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세 자금으로 주식에서 연 204만 원 정도는 벌었다. 게다가 전세에 들 경우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를 사야 하고, 이사 때 일일이 챙겨야 해서 번거로웠다.


나는 88만원 세대에서 번식 탈락자로 착실히 암흑진화 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속수무책의 중년은 아니다. 사실 그들이 내 전셋집으로 생각하는 작은 아파트나 내가 살고 있는 변두리에 있는 방 10개짜리 소형 원룸 건물 정도는 나도 살 수 있다. 그러나 결혼 전에 굳이 큰 집으로 가야 할 필요성도 느낄 수 없고, 이런 건물을 사 봐야 수익률은 연 8%도 안 될 것 같았고, 목돈을 아파트에 묶어두는 것은 비효율적이어서 이곳에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살아도 나는 갑에 가까웠다. 계약서 상에서 을이지만, 계약을 갱신할 때마다 안도하는 것은 집주인 쪽이다. 형광등을 LED등으로 교체하거나 보일러가 고장나거나 입주민 누군가가 시끄럽게 굴면 집주인이 신속하게 해결해줬다. 나는 저렴한 금액에 주택 서비스를 받는 쪽이라서 집 없는 설움을 경험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여차하면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어 자유로웠다. 그러나 혼자에 지쳐서일까, 중년의 감수성일까. 정말 구해줘 홈즈. house 말고 home, 요즘 그런 기분이다.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방문을 열고 들어갈 때, 가끔 러브하우스 성우의 나레이션을 나지막이 따라 하기도 했다. 당연히 바뀐 것은 없었다. 늘 아침에 나간 그대로 방이 정물처럼 있었고, 나는 그 속에 들어가 정물을 완성했다. 내 이름으로 된 정물화 속에서 나는 조금 활동적인 가구가 되었다. 책상처럼, 의자처럼, 책꽂이처럼 나도 낡아갔다. 의자의 삐걱대는 소리가 내 무릎에서 날 때도 있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뀌었을까요?’의 대답은 아니다.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사의 조건은 결혼이든 이직이든 내 신상에 변화가 생기거나 층간소음에 시달릴 때다. 전자는 시간이 갈수록 가능성이 떨어져 가고, 후자는 가능성이 열려 있으나 현재 아랫집과 옆집은 멀쩡한 사람들이다. 이곳에서 30대를 오롯이 보내고 보니 30대가 이 방만큼 밀폐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40대는 숨통이 더 트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새 아파트를 얻어 간다고 해도 ‘따라따란 딴~ 따라다라라라~’은 없을 것이다.


영화 [나 홀로 집에]는 단순한 진실을 이야기했다. 어린 캐빈에게 집은 금기의 공간이었다. 부모님과 형은 캐빈에게 ‘하지 마!’라고들 했다. 캐빈은 집에 혼자 남게 되자 모든 금기에서 해방되어, 아빠의 면도 크림을 쓰고, 형의 거미를 함부로 다루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돈을 썼다. 처음에는 자유를 만끽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유는 빈 공간으로 내려앉았다. house를 가져도 home을 가지지 못한다면, 자유와 허공은 서로 닮아가기 시작할 것이다. 내 방에 고요히 울려 퍼지는 넷플릭스의 시간 동안 나는 허공이었다.


home이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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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성적표는 house에서 home으로 바뀌어야 한다. 좋은 house가 좋은 home을 만들 가능성이 높지만 민달팽이들도 행복한 home을 꾸리는 것이 가능하다. house가 home에 선행해야 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한 민달팽이들은 바닥만 기다가 인생을 끝낼 것이다. - 그런데 엄마, 미안. 난 그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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