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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Sep 06. 2024

팩트 폭행의 이로움, 체중계

폭락장에는 주식앱을 켜지 않았다. 파란 나라만 내 나라, 개미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줌 투자금 묻어뒀다. 꿈과 사랑이 가득하고 천사들이 살던 곳에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돈도 이렇게 쉽게 잃어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 모든 우울은 스마트폰 밖에서는 없는 일이다. 손절하지 않은 것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惡手)였다는 것이 되새겨질지언정, 모르는 게 약이었다.


체중이 폭등할 때도 체중계에 오르지 않았다. 자위와 안도를 위한 최후의 악수(握手)였다. 주식은 내 의지 바깥에서 벌어지는 불확실성의 전장이지만 역사는 우상향하므로 이 악물고 버티면 회복 기회는 준다. 그러나 체중은 내 의지의 결과이므로 살이 찌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얼굴이 둥글어지며 배가 무거워졌다. 크게 입던 셔츠가 몸에 딱 맞아서 답답해졌을 때, 위기를 직감하면서도 체중을 확인하지 않았다. 모르는 게 독이었다.


체중 감량할 때는 매일 아침 체중을 재서 달력에 꼬박꼬박 기록했다. 화장실 앞에 체중계를 두고 화장실 들락거릴 때마다 체중을 재며 배변량까지 체크했다. 어제-오늘은 가시적으로 비교되지 않지만 지난주와는 비교되었다. 체중이 우하향하는 만큼 의지에 살이 쪘다. 체중은 아는 게 힘이었다.


2년 전 역사적 감량에 성공하며 비만과 꽤 간격을 벌려둬서 오랫동안 체중계에 오를 필요 없었다. 거의 1년을 체중계 없이 살았다. 내가 모르는 동안 나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살 쪘고, 느렸기에 체감하지 못했다. 살이 찐 것을 체감했을 때는 나쁜 습관에 관성이 붙었다. 펜데믹 시절 주1치킨이 복원되었다. 자전거조차 타지 않았다. 내가 가장 뚱뚱했을 때 느꼈던 복부빵빵감이 올 봄, 다시 차올랐다. 위기감에 눈감았다. 어차피 수습할 ‘의지’가 없었다.


아직 위기가 정점을 치지 않았다는 ‘믿음’이 있는 한 나는 안온했다. 실체를 확인하는 일은 믿음을 깨뜨림으로써 불안정성을 가중하는 또 다른 자기학대였다. 궤변인지 알지만, 애초에 종교가 그러했다. 몸이 불안정하므로 마음이라도 안정시키고 싶은 것이다. 나는 현실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현실이란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의지만큼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내 종교의 이름은 다시, 치킨이었다. 치킨이 맛없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다.


내게 가장 가까운 현실은 당연히 내 몸이다.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배가 압도적 현실이었다. 기분 탓인가, 허리를 숙일 때도 불편한 듯했다. 정점 근처겠다는 불안감에 체중계에 섰을 때, 어라, 83kg? 그러면 안 되는데, 안도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설정한 체중 허용 한계선은 80kg이었다. 그 수치도 과체중이지만, 8은 둥글고 7은 날렵해서 7의 후반을 인정했다. 3kg 정도는 한 달이면 어찌 해 볼 수 있는 수치였다. 그러나 이것저것 무분별하게 먹어도 단 한 가지 먹어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마음이었다.


여름, 내 새로운 종교의 이름은 육회비빔냉면이었다. 출근길의 캔음료, 퇴근길의 아이스크림으로 미사까지 더해졌다. 여전히 최고존엄 치킨도 모셨다. 식문화 한정, 나는 다종교였다. 내 오래된 신앙심은 깊었다. 복부빵빵감에 쉽게 익숙해져갔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떻게든 되겠지, 어이 체중계 씨, 눈치 없이 팩트 폭행 같은 거 하지 말라고,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어도, 심장이 뚱뚱거려도, 있는 힘껏 모른 척했다. 뚱뚱감이 정점을 돌파했을 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에 체중계에 섰을 때, 어라? 2022년 초, 나는 대체 얼마나 속수무책의 뚱땡이였던 걸까.


인간은 쉽게 뚱뚱해지지 않는구나, 아직 최악까지는 여유가 있구나, 새로운 면죄부를 받은 날, 치킨집에서 앱 할인 쿠폰 배달 거부해준 덕분에 다이어트가 시작되었다. 반전의 탄성에 힘입어 주말에 조금 적극적으로 덜 먹었더니 월요일 아침 희망찬 숫자가 보였다. 체내 잔류 음식이 줄어든 때문이지만 숫자가 보여주는 확실성은 뿌듯했다. 이 허수의 힘으로 새로운 관성이 붙었다. 허기에서 희망의 맛이 났다. 매일 아침 눈 뜨면 화장실에 가기 전에 체중을 쟀다.


잠들기 전, 내일이 기대되었다. 기대가 오랜만이었다. 계획된 스케줄에 변수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기대라고 할 수 없었다. 일상이란 해야 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꿈은 쫓지만, 의무에는 쫓긴다. 꿈도 쫓다 보면 어느새 쫓긴다. 통제되지 않는 일상 변수에 내구력을 키우는 정도가 나잇값이었다. 나잇값은 성취가 아니라 안도에 값을 치렀다. 해야 하는 것을 마땅히 해내는 보상 없는 숙제가 내 일인 내일이었는데 무려, 내가 궁금했다.


체중계 위에 내 성취가 있었다. 안도하기 급급한 내 일상에 확실하고 즉각적인 성취감이 바삭바삭 튀겨진 치킨보다 맛있다. 매끼 식사 조절이 가능해졌다. 올해 입문한 육회비빔냉면, 치즈돈가스, 유부초밥+모밀세트도 끝났다. 끈적끈적 달라붙었던 음료, 아이스크림, 믹스커피가 끊어졌다. 토마토, 바나나가 복원되었고, 계란, 두부가 신규 입성했고, 운동량도 늘어났다.


몸이란 나 자신을 향한 집중력의 표상이다. 체질 따라, 환경 따라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내 경우는 그러하다. 내 의지가 곧 몸이고, 군것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팩트로 확인된다. 체중계 위에서,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갈 자신을 낙관(樂觀)한다. 오늘 아침, 어제에 낙관(落款) 찍는 일이 즐거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한 주였다.



다이어트 2주차 : 지난주 대비 -1.2kg (누적 -3.2kg)

  - 체중계 고장났나?

  - 걸어서 퇴근 누적 3회

  - 갤럭시핏3 주문 (아마 글로 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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