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외식이다. 외식 메뉴는 탄수화물과 단백질의 달고 짠 난장이다. 주5일에 매달린 학생이나 직장인들에게 고칼로리는 숙명이다. 점심, 저녁마다 다이어터는 울며 겨자 먹는데, 이 놈의 겨자는 지나치게 맛있다. 맛은 칼로리와 비례한다. 업무 중이라면 스트레스 때문에, 사생활 속에서는 기분 내기 위해 칼로리에 순응한다. 애초에 저칼로리는 선택지에 없었다. 다이어트는 채식 도시락 싸들고 다닐 성실한 각오가 필요한 대업이었다.
집에서 채썬 낸 당근과 삶은 달걀을 챙겨 나올 때도 있었다. 커피와 점심으로 도시락을 먹을 때면, 잘 사육된 소나 말이 된 기분이었다. 일해라 짐승아, 자학적 지시를 내리는 배덕감이 은밀히 통쾌하기도 했다. 도시락 챙기기 귀찮을 때는 인근 마트에서 바나나와 요구르트를 사 먹기도 했고, 생두부를 죄수처럼 먹기도 했다. 비만에서 출소한 죄수에게 생두부는 잘 어울렸다. 회개해도 죄는 kg 단위로 남아 있었다. 두부에서는 죄를 응징하는 정의의 맛이 났고, 나는 정의를 좋아했다.
정의는 귀찮았다. 결국은 외식과 타협봐야 했다. 국밥, 돈가스, 중국음식을 끊고 나면 선택지가 줄어들었다. 대안은 잔치국수, 칼국수였다. 탄수화물 폭탄이었지만 기름기는 적었다. 양념장을 넣지 않는 대신 고추나 김치를 많이 먹어 채소를 보충했다. 칼국수집에서 보리밥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보리밥을 애용했다. 그리고 부주의 맹시에서 깼다. 칼국수집 가는 길에 지나치는 돼지국밥집에 ‘여름 별미 묵밥’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묵밥은 ‘18끼 연속 국밥 먹기 챌린지’ 때 메뉴에 넣으려고 하다가 물회와 함께 국밥 정통성 문제로 최종 승인하지 못했던 메뉴였다. 급식으로 먹은 것을 제외하면 외식으로서의 묵밥은 한두 번밖에 없었다. 오이 냉국을 좋아는 식성이라 입에 잘 맞았지만, 포만감이 다소 아쉬워 굳이 찾을 음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이어트 중인 이상 이보다 적절한 음식도 없었다.
‘냉면 국물에 밥 말아 먹는다.’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지만, 막상 먹어 보면 깔끔한 여름이다. 잘게 썬 김치의 시큼함과 냉면 육수의 새콤함이 살얼음으로 조합되면 모든 섬유소들은 아삭하게 가지런해졌다. 상추, 미나리, 깻잎, 오이, 미역은 물론 고수도 동치미 하위호환쯤으로 탈바꿈될 듯했다. 여기에 김가루가 뒤섞여 날카로운 맛이 고소하게 완충되었다. 메인 식재료로는 소면이나 만두가 들어가도 맛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국인은 도토리묵을 선택했다. 도토리묵은 식재료 생태 경쟁에서 살아 남은 최적자로서 여름의 값어치를 했다.
국물에서는 시제품 냉면 육수 맛이 났다. 시제품은 아주 맛있는 건 아니더라도 맛의 석학들이 이룩한 과학으로서 평균은 했다. 내 미감 허들은 낮아서 시제품들도 내 입에 잘 맞았다. 먼저 고명을 피해 국물 두세 숟갈로 입을 적셨다. 국물은 침의 마중물이다. 퍼넣은 국물보다 침이 흥건해지며 입 안에 제대로 된 식당이 차려졌다. 반쪽짜리 계란부터 한 입에 넣었다. 냉면이든, 잔치국수든, 짜장면이든 삶은 계란 반 개가 올라간 모든 음식을 먹을 때 따르는 준비운동이었다. 계란 노른자가 퍽퍽하다 싶으면 국물 몇 숟갈 더해서 축였다. 그래 이 맛이야, 본게임이 시작되었다.
후루룩 마실 때 걸릴 법한 얼음 덩이는 빼내고, 밥을 말았다. 밥은 영세했다. 꾹꾹 눌러 담은 옆집 보리밥 반도 안 되었다. 묵밥 원가율 50%는 됨직한데 밥을 아껴야만 했나 고깝지만, 오히려 그 상태가 내게 최적자였다. 묵밥에 들어가야 할 묵 정량은 모르나 숟가락을 휘젓기 번거로울 정도로 푸짐했다. 비빌수록 묵이 으스러지며 부피가 커졌다. 밥에 묵이 비벼진 게 아니라 묵에 밥이 비벼져 칼로리가 정의로웠다.
회를 초장 맛에 먹듯, 묵밥은 국물의 으스러진 묵알갱이의 부피로 먹었다. 묵은 ‘맛’이 있다기보다는 부드럽되 쫄깃한 ‘식감’이 풍부했다. 담백하고 고소하다지만, 나는 맛의 깊이를 음미할 줄은 몰랐다. 한식 뷔페에 가면 한두 개 입가심할 정도로나 먹을까 일상에서 일부러 사 먹진 않았다. 그러나 묵밥의 묵은 특별했다. 쌕쌕에 든 귤 알갱이처럼, 봉봉에 든 포도 알갱이처럼, 코코팜에 든 코코넛 알갱이처럼, 씹어 먹는 국물이었다.
묵밥 국물은 이제 시제품 냉면 육수가 아니다. 밥이 말리고 고명이 비벼진 국물은 각자의 질감이 종합된 식감이었다. 식감으로 존재하는 국물이므로 묵밥은 먹는다기보다는 마셨다. 숟가락은 식사의 존엄을 위해 필요한 형식일 뿐, 나는 꽤 게걸스러웠다. 사실상 식재료가 조립되는 음식이라 주문하면 금방 나왔고, 그 시간에 준할 속도로 먹어치웠다. 어차피 국밥집, 게걸스러움은 국밥을 먹는 예의다.
국밥은 뚝배기를 비워내는 맛이 있다. 펄펄 끓던 뚝배기를 끝내 비워내면 정복감까지 든든했다. 그러나 칼로리를 생각하면 뒷맛이 개운치 않다. 반면 묵밥은 칼로리 걱정에서 자유롭다. 냉면 육수 시제품은 국물 한 팩에 20-40칼로리다. 대접의 묵밥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워도 400칼로리 남짓한 한끼다. 끼니를 지배하되 죄스럽지 않았다.
식사 직후에는 물배가 빵빵했다. 화장실 한 번 다녀오며 마신 만큼 비워내도 포만감이 길게 갔다. 섬유소가 풍부해서 소화가 느린 덕분이다. 지속되는 포만감의 안전 장치이자 묵의 가장 맛있는 형식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여름이 좀 더 가벼웠을까. 여름의 끝에서 만난 묵밥과 헤어질 준비를 하며 열심히 먹는 중이다.
지난주 대비 -0.3kg(3주 누적 -3.5kg). 체중계 오차가 큼. 식단조절도,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