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줍는 노인들의 플랫폼
자유, 평등 이전에 절대적 빈곤이 있다. 먹을 것 없는 곳에 인간의 존엄성도 없다. 나는 내 방에서 폐지 줍는 두 할머니가 싸우는 걸 들은 적 있다. 네가 가져갔느냐, 그게 뭐 어떠냐, 영역다툼하는 길고양이처럼 목청이 찢어졌다. 공병 200원인가, 300원 때문이었다. 제발 좀 조용히 해달라고 500원씩 나눠주는 대신, 잠자코 창을 닫고 에어컨을 켰다. 30분쯤 틀면 전기세 500원쯤 나오려나. 간단하게 조용할 수 있는 권력이 미안했다.
200원은 30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과자 한 봉지밖에 안 되는 돈이었다. 30년 전에는 상상도 못할 신세였을 것이다. 당시 40~50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남자는 회사에 뼈를 묻고, 여자는 가사에 생이 묻히던 시절이었다. 자식이 노후를 보장할 거라 믿었겠지만, IMF-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각자도생이 세대불문 보편 상식이 되었다. 젊은 날 개발 독재의 노동 착취를 견뎠더니 늙어서 노년 착취에 속수무책이다. 나는 두 할머니의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모른다. 욕설이 사나워도 몸싸움까지 가지 않았을 것은 안다. 이기든, 지든, 의료보험 처리된 병원비조차 두려웠을 것이다.
싸우던 할머니 중 하나는 나름 ‘거상’이었다. 인근 언덕 아래 승용차 두 대를 잇대어 주차할 만한 공간에 폐지를 키보다 높이 쌓고,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모았다. 차곡차곡 쌓인 더미는 매일 조금씩 변하는 행위 예술품이거니 했다. 아카시아가 필 때, 폐지 무더기는 그로테스크했다. 일정 기간에 한 번 대형 트럭이 와서 폐지를 수거해 갔다. 그때 깨끗해진 느낌을 받았지만, 공간이 비면 기껏해야 주차장으로 쓰일 테니 이 할머니의 아지트에 불만은 없었다. 플라스틱 구조물에서 금속을 발골하느라 시도 때도 없이 쾅쾅 물건을 부숴대는 것도 참을 만했다. 최소한의 먹고 사는 노동은 민간에서라도 존중해야 했다. 자원재활용 의무를 노인들에게 저렴하게 외주화한 정부는 독재든 민주든 당신들에게 착취 주체였다.
착취는 합법이었고, 아지트는 불법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전후로 없어졌다. 시나브로 줄어든 것인지, 날 잡아서 정리된 것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겐 철거로 인식되었다. [난쏘공]의 “그들 옆엔 법이 있다”가 지엄했다. 당신이 좀 더 가난해져야 하는 건 합법적이었다. 혹은 당신이 불법인간이어야 했다. 밥이 없는 합법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예상대로, 골목 주차 공간이 조금 늘었다.
아지트가 번성할 때 당신은 리어카를 끌고 다녔다. ‘할아버지=리어카, 할머니=카트’ 공식을 깼기에 눈에 띄었다. 나는 초등학교 주번 때나 리어카를 몰아본 게 전부라 리어카에 실린 무게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지트가 낮은 경사로 꼭대기에 있어서 리어카가 쉽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당신은 코로나 팬데믹 이전 어느 12월 31일 밤에도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고, 아지트가 없어진 2025년 1월 1일 01시에도 오렌지 거리에서 카트를 채우고 있었다. 아지트가 없어져서 리어카를 버린 것인지, 리어카를 쓸 수 없어 아지트를 처분한 것인지 물을 수 없었다.
당신과 말을 섞은 건 두 번이었다. 한번은 당신이 내게 도움을 청했다. 대형 브라운관 TV를 실어야 하는데 당신 혼자 불가능했다. 들어서 옮기는, 내겐 간단한 일이었다. 2,500원짜리를 내 덕분에 무사하게 건질 수 있다고 고맙다고 했다. 당신의 얼굴에 안도감이 묻어났다.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인 세계에서 시간은 돈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조바심 속에서 젊은 남성의 근력은 구원이었던 모양이다. 지나친 감사 인사가 민망했다.
그 일 때문에 안면을 튼 것인지,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인사를 하게 된 것인지는 몰랐다. 한동안 아는 척했다. 스몰토크로 적당한 호의만 주고받으면 되겠거니 했다. 내 나름대로 실천하는 타인의 존엄성을 열어주는 환대였다. 그러나 당신은 말이 많았고, 나는 대화를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 듣기였다. 묻지도 않은 사연이 쏟아졌다. 일목요연했다면 적당한 감정쓰레기통 역할을 자처했을지도 것이다. 그러나 한 말 또 하고, 전개되는가 싶다가도 결국 한탄으로 반복되는 화법은 기어이 선을 긋게 했다. 당신이 눈에 띄면 피하고, 피하지 못하면 시선을 돌리며, 우리는 본래대로 정물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당신의 자식 이야기가 아팠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미를 폐지 줍게 만드는 자식을 방어한다.’는 인상은 강했다. 당시는 자식 얘기에 지쳐 있을 때였다. 지인들을 만나도 내가 본 적도 없는 자식 얘기를 했다. 자식은 당신들에게는 가장 큰 삶이겠지만, 내 삶에 개입하는 건 당신 자식이 아니라 당신이고, 나는 지금 당신을 만나는 중이다. 그래서 길에서 주저리주저리 늘어지는 남의 자식 이야기가 좀 더 거슬렸던 모양이다. 물론, 지금은 자식을 방어해야만 하는 심정을 안다. 당신들은 원치 않겠지만, 폐지 줍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자식들이 괘씸하다. 우리 엄마는 그리 만들지 않아야지, 괜히 한 번 전화한다.
당신은 배가 아니라 말이 고팠던 건 아닐까. 먼저 인사해준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아낼 정도로. 이곳은 노인이 줄어드는 동네다. 대학생은 매년 갱신되고, 외국인은 늘고 있다. 노인은 동네를 떠나거나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당신이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지만, 얇아져 가는 인간관계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농가였던 곳은 일찌감치 비워져 갔고, 한번 빈 농가는 다시 채워지지 않았다. 내 세대의 말의 빈곤은 온라인상에서 인스턴트로라도 채워지지만, 당신들은 무력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모른 척해주는 예의를 수행 중이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적 없다.
이 동네에는 폐지를 줍는 사람들이 많다. 트럭을 몰고 다니며 상가 거점 중심으로 크게 활동하는 부부도 있고, 뒷바퀴가 망가진 카트를 탁, 탁, 보행기처럼 끌고 다니며 마실 나온 김에 습관적으로 줍는 할머니도 있고, 늦은 밤 오토바이를 타고 쓸 만해 보이는 물건 위주로 줍는 할아버지도 있다. 아마 내가 인지하지 못한 그저 풍경이었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고물상으로 모였을 텐데,
며칠 전, 어쩌면 몇 주 전, 인근 고물상이 폐업했다. 둥지로 끝에 있던 고물상이었다. 자전거로 정평동에 갈 때면 그 앞을 지나갔다. 초여름까지만 해도 ‘자원’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는데, 9월 중순, 그곳은 공터가 되어 있었다. 땅바닥과 나무가 보였다. 수거하지 못한 쓰레기가 돌멩이와 섞여 있었고, 느티나무는 지나치게 초록이었다. 텅 빈 공간을 보고나서야 나는 고물상의 이름이 뭔지도 몰랐다는 것을 알았다. 고물상의 영업 이익 문제인지, 대임지구 공사 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노인들의 폐지 처분이 불편해진 것은 알 수 있었다.
며칠 후, 고물상 화장실로 추정된 간이 공간 앞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가 없어져 있었다. 휴지를 가져 간 사람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을까. 취준생 시절, 대학 도서관에서 어중간하게 남아 밖에 빼놓은 휴지를 가방에 넣어 온 적 있었다. 두루마리 휴지 하나 500원쯤 하던 때인가. 자유, 평등 이전에 절대적 빈곤이 있다. 먹을 것 없는 곳에 인간의 존엄성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