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겨울잠을 자고 싶지 않을까
영남대 운동장 벤치에 먼지로 만든 사내들이 종종 보인다. 수염과 머리가 덥수룩하고, 배낭과 에코백에 짐이 과하게 빵빵하며, 무엇보다도 혼자만 명도와 채도가 다르다. 풍경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지만 괜찮았다. 구멍은 고요했고, 나는 지나치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운동장 벤치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동네에서 목격될 때는 차원이 딸꾹질이라도 한 것 같았다. 세 번, 우리동네에서 노숙자를 만났다.
딸꾹, 창밖에 한국어가 지나다닐 때니, 10년도 넘은 일이었다. 아닌가? 아무튼 코로나 전이었다. 지금은 지역 방범대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지나다닐 때를 제외하면 한국어가 드물었다. 한국어만 있던 동네에 중국인 유학생들이 들더니 어느새 중국어조차 들리지 않았다. 요즘은 국적을 알 수 없는 외국어가 주류를 이뤘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불 끄고, 자기 전 배에 노트북 올려두고 예능과 드라마를 챙겨 보던 시절, 창밖에서 ‘살려 주세요!’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 에잇, 씨부랄 것들 - 연인들에게 질투가 남아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동거중인 대학생의 꽁냥대는 한 밤의 무례로 이해했다. 귀 기울여도 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왠지 남녀의 간지럼 태우는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무시하고 보던 드라마를 계속 봤다. 잠시 후, 창밖에서 넘어온 파랗고 빨간 불빛이 뱅뱅뱅, 천장을 흔들었다. 경찰이었다.
경찰차 한 대와 경찰 둘, 사람 몇 명이 있었다. - 이걸 신고했다고? - 조금 어이 없기도 하고, 조금 심각해지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나오던 목격자 역할, 드라마보다 재밌을 것 같았다.
화장이 단정한 여경이 예뻤다. 이 밤에 굳이 이렇게까지 메이크업하고 일해야 하나 의아했다. 이것저것 물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나도 한두 마디 증언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좀 추레한 사내가 상황을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얘기한 건 기억난다.
“어디서 들으셨어요?”
경찰의 질문에 사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누구도 말을 잇지 않는 것으로 사내는 노숙자로 확정되었다. 들어온 신고는 형식대로 소화되었다. 생각보단 시시했다. 경찰이 뜨기 전에 방으로 돌아왔지만, 노숙자는 재밌었다. - 우리 동네에 노숙자가 산다고?
그가 있을 만한 곳은 우선 풀숲이었다. 허리 높이의 잡목으로 경계를 이룬 풀숲은 사람 눈을 피해 눈을 붙일 만했다. 그러나 개미를 생각하면 비현실적이었다. 개미는 산 것과 죽은 것을 가리지 않고 달라붙었다. 그다음 후보지는 원룸 옥상이었다. 다른 원룸은 몰라도 우리 원룸은 옥상을 잠그지 않았다. 발소리를 죽이고 오르 내리면 알 길이 없었다. 내 방 위에 누군가가 누워 있다고 상상해도, 찝찝하거나 불안하진 않았다. 어차피 옆집과 아랫집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노숙자는 인터넷도 안 될 텐데, 밤이 길겠다 싶었다.
노숙자는 완전히 잊혔다. 의식되지도 않았고, 보이지도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는 자리를 옮겨가며 이 동네 어딘가에 있었을 텐데,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딸꾹, 딸꾹, 2022년, 어쩌면 2023년 겨울, 크리스마스 전후였다. 퇴근길에 공원 정자에 두꺼운 이불을 깔고 누워 있는 침낭을 봤다. 침낭은 머리끝까지 잠겨 있었다. 나는 모른 척 걸었지만, 어라, 이게 뭐지, 이래도 되는 건가, 머릿속에 말줄임표가 다다다, 빠르게 찍혔다. 밤 길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집에 오자마자 검색했다. 그날 최저 기온은 영하 5도인가 그랬다.
다음날 아침, 나는 내가 동사자의 목격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며 마음 졸였다. 걱정했으나 목격자 역할을 1%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는 그대로 있었다. 다가가 생사를 확인할까 했지만, 살아 있으면 무안할 테고, 죽어 있으면 끔찍할 테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덩어리를 그냥 지나쳤다. 퇴근길, 정자에 폴리스라인이 없는 걸 보면 무슨 일도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의 이불과 침낭은 정자 아래에 잘 개켜져 있었다.
그 겨울, 그는 불규칙적으로 정자에서 잤다. 주민신고를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전략 같았지만, 정자가 아닐 때, 그가 어디에서 밤을 보내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핫팩 한 박스를 사서 그의 침낭 사이에 끼워줬다. 선의라기보다는 ‘무슨 일’을 은밀히 바랐던 비열함에 대한 죄값음이었다. 혹은 내 호혜가 따뜻하게 이용되는 ‘무슨 일’을 목격하고 싶은 또 다른 비열함이었다. 그는 차라리 따뜻한 동굴에서 겨울잠을 자고 싶지 않았을까. 그의 침낭을 지나칠 때, 나는 부끄러웠다. 그는 봄이 오기 전, 동네에서 사라졌다.
딸꾹, 딸꾹, 딸꾹, 2025년 여름이었다. 일요일 아침 7시 30분 출근길, 대학가 상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네컷사진점에서 외부로 틀어 놓은 음악이 아침을 범했다. 목격자가 없어 고요는 괴괴했다. 이날은 빠뜨린 인쇄물이 있어서 무인 인쇄소에 들렀다. 그곳에 덩치 큰 사내가 네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시간에 드문 일이어서 눈이 갔다. 인쇄물을 스테이플러로 찍는 공간에 빵빵한 배낭과 에코백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먼지로 만든 것 같은, 명도와 채도 다른 정물화 속에, 먹다 남은 빵조각만 컬러로 선명했다.
노숙자와 실내를 공유하기는 처음이었다. 의도적으로 냄새를 맡아도 의외로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노숙자가 아닌가도 싶었지만, 밤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노동자인가도 싶었지만, 그런 사람이 왜 윈도우에 기본 설치된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집에 인터넷이 되지 않던 이십 몇 년 전에 나도 때우던 시간이었다. 당신에겐 시간이 너무 많았을 것이다. 당신도 차라리 어디 시원한 곳에서 여름잠을 자고 싶을까. 화면에 카드가 쌓인 걸 보니 게임은 꽤 진행된 상태였다.
나는 괜찮았다. 3분 안팎으로 머물다가 나가면 그뿐이었다. 다만 20-30분 후에 올 주인이 문제였다. 주인은 아침 8시 전후로 와서 청소도 하고, A4지도 보충했다. 30대쯤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자기 가게에 있는 40-50대 노숙자 남성을 어찌 대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이 ‘무슨 일’도 보지 못하고, 하던 대로 출근했다.
내게 그들은 무슨 일도 아니었다. 아마 내가 남성으로 겪는 특권적 안전감일 것이다.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내겐 무해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겐 불안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더 적극적으로 얌전해야 했을 것이다. 존재하기 위해 흔적을 지워야 했고, 기억되지 않아야 했을 것이다. 그들의 사연이 특별히 궁금하진 않다. 그들은 내가 될지도 몰랐던 불안이었다. 지금도 나도 결국 저렇게 종결될지 모른다는 예감에서 썩 자유롭진 못하다. 그래서 그들의 24시간은 궁금하다.
나는 남매지 카페 3층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쓴다. 내가 보는 풍경 안에 그들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시간에 묻혀 있을까. 그늘은 조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