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축된 묵비권이다. 얼음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다. 꽃봉오리는 회색 솜털을 두르고 버틴다. 솜털은 촛불처럼 켜지나 부드럽지도, 뜨겁지도 않다. 콘크리트처럼 까슬까슬하고, 금속처럼 차갑다. 칼바람이 몰아칠 때, 가지는 흔들려도 회색 촛불은 끄떡없다. 오히려 바람이 멈출 때, 겨울을 통과한 작은 동물의 등처럼 미묘하게 숨을 쉰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겨울 불꽃 속으로 고요가 말려 들어간다. 한없이 아우성에 가까운 침묵이 살 찐다. 침묵의 안쪽에, 봄이 팽팽하게 잉태된다. 보이지 않지만 안다. 해의 논리는 항상 정당했다. 햇빛이 닿으면 솜털이 은빛으로 일어나며 꽃이 온다. 목련은 시간 문제다.
목련은 크다. 참았던 침묵의 폭발, 막무가내의 덩어리다. ‘송이’가 아니라 ‘포기’ 단위로 세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겨울의 포기다. 겨울의 항복 선언이 폭설처럼 내린다. 가지에 작은 눈사람들이 덩어리째 열린다. 눈의 기억으로 눈을 닮아 그늘을 밀어낸다. 둥글게 말린 포기들이 환하다. 꽃잎은 종이보다 두툼하다. 꽃잎 위에 묵비권의 기록이 빽빽하다. 침묵으로 벼린 촉촉함은 설명이 불필요한, 이미 사실이다. 맨들맨들한 한 포기를 껍질째 베어 물면 농축된 겨울이 과즙처럼 흘러내릴 것 같다. 목련의 즙에서는 농축된 겨울로 만든 봄향이 난다. 목련은 그림자도 크리미하고 달달하다. 겨울이 휘발되고 나면, 완연한 봄이다.
크기는 그 자체로 기의다. 겨울 색으로 가늘게 선 줄기가 특수 맥락이다. 저렇게까지 비율이 어긋나도 되는가, 의심, 위화감, 긴장감으로 심리적 목련은 더 커진다. 꽃이 아니라 봄의 하중이다. 나무가 꽃을 피운다기보다, 꽃이 나무를 짓누른다. 포기, 포기, 포기, 점령군의 권리 행사다. 겨울의 항복이야말로 봄의 행복인 듯, 목련은 과잉을 모른다. 그러나 괜찮다. 목련은 애초에 겨울이 아니라 봄의 기표였다. 침묵으로 기의를 지켜낸 봄 사전에 포기는 없다. 송이, 송이, 송이, 나무에 쌓인 봄눈이다. 얼지 않는 부피는 쌓여도 하중은 빛깔로 샌다. 크기는 목련의 특기다. 꽃의 권리 행사다.
목련은 침묵을 어근으로 하는 파생어이면서 침묵의 기표이자 기의다. 지시할 대상이 없다. 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봄 덩어리다. 매화처럼 고상한 의미를 매달지 않는다. 자잘하게 속닥대지도 않는다. 퉁, 침묵이다. 목련의 꽃말 고귀함, 숭고함, 순결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의미가 침묵되어 침묵이 의미로 열린다. 공원, 학교, 화단에서 목련은 목련으로 종결된다. 그래서 ‘목련이 피었다.’는 어떤 맥락에서도 새 의미를 파생하지 않는다. 목련은 그저 봄이어서, 봄은 목련빛이다. 눈과 구름을 읽어 하얗고, 햇빛을 모아 노르스름하다.
목련은 봄의 전제다. 이미 당연한 것을 구경하겠다고 나들이를 나서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목련은 일상에서 사람들의 시선들을 모은다. 무수한 ‘목련이 피었다’를 담기 위해 목련은 덩어리여야 했다. 커서, 얼굴과 얼굴의 만남이다. 목련을 바라보는 것은 봄을 향한 예배다. 봄은 내게로, 나는 봄으로 삼투된다. 평형 상태가 침묵이다. 침묵하며 봄에 머문다. 계절의 논증이 아니라 시간의 집중이다. 충분히 바라보면, 목련은 봄에 태어난 고요의 경험적 합성어다. 여름, 가을, 겨울은 노르스름한 하양을 모른다. 봄이 짧다면, 목련을 충분히 바라보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봄은 짧아지고 있다. 기후 위기에서 자유로운 계절은 없다. 목련의 시간도 당겨졌다. 매화의 시간을 좇아간다. 매화는 늘 먼저 피었다. 그림과 시 속에서도 피었다. 고결함과 기품도 축제로 소비된다.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꽃말은 상품이다. 봄꽃은 대체로 상품이다. 아직 목련 축제는 없다. 목련은 현실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현실 바깥에 서 있다. 일상의 고결함과 기품을 지키는 고요의 사원이다. 순례자는 없지만, 자리를 침묵으로 지킨다. 목련을 바라볼 때, 모든 봄노래는 끈다. 짧아진 목련의 시간을 붙드는 효율이다.
목련은 질 때 아름답지 않다. 겨울을 버티던 고고함이 무색하다. 꽃잎이 썩어가듯 갈변해 축 늘어진다. 벚꽃이 흩날리며 멀리 사라진다면, 목련은 부패를 노출한다. 낙화가 아니라 낙하의 낙서다. 바닥에 널린 패배는 지저분하다. 그래서 정직한 봄이다. 봄은 겨울을 무찌른 점령군이 아니다. 꽃은 승리의 세레모니가 아니다. 그저 차례다. 차례를 지키는 한 목련은 패배하지 않는다. 파멸될 뿐이다. 그러나 내년에 다시 필 것이다. 봄을 낚는 기분으로 목련을 마주본다. 3분 의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날씨가 비로소 평안하다.
사족) '목련'은 브런치 해시태크 키워드 단어에 검색되지 않는다.